제주 도두동 해안도로 방호벽이 무지개 색으로 칠해져 있다. 도로를 나누는 경계석이지만 파스텔 톤의 색이 더해져 작품처럼 다가왔다. |
코로나가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을 적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피로를 느껴 무작정 항공권을 예매했다. 차도, 운전 면허도 없었다. 20대 초반, 홀로 20만원만 들고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대구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가 뜬다. 항해한다. 바다가 보이고 그 뒤로는 큰 섬이 나온다. 신비의 섬 제주도다.
제주에 도착하니 육지에선 쐬기 힘든 강한 바람이 분다. 10월이었다. 야자수와 'HELLO JEJU' 조형물이 여행객을 반긴다. 뚜벅이로 여행해야 했기에 그나마 교통편이 좋은 곳으로 숙소를 잡았다. 공항으로도, 제주 북동편 관광지로도 가기 편한 용담동이었다. 용연계곡과 해안가까지는 도보 20분 내로 이동이 가능했다. 그 뒤로 무지개 해안도로, 도두봉, 이호테우 해변, 남쪽으로는 한라수목원 등도 대중교통 이용 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관광지는 가기 어려웠지만 여행 목적이 관광보단 '힐링'이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흑돼지, 고등어회, 갈치조림 등 지역의 여러 음식 중에서도 고기국수가 가장 궁금했다. 제주 특유의 국수 요리로 돼지고기 수육이 고명으로 올라가 고기국수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공항 근처에 위치한 맛집에 방문했다. '자매국수' 본점이다. 지금은 이호테우 해변 근처에 자리하지만 당시엔 제주 시내쪽인 삼도이동에 위치했다. 원래도 유명했는데 몇 년 전 백종원이 다녀가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고기국수 메뉴는 국물이 들어간 국수와 비빔국수 두 개가 있었다. 전자로 주문했다. 큰 식당이다 보니 직원도 많고 회전율도 빨라 10분도 안 되어 음식이 나왔다. 국수는 사골국맛이 났는데, 담백하면서도 구수했다. 면은 중면이었는데 쫄깃했다. 국수 위에 올라간 돼지고기 수육은 꽤 큼직했다.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이 정도 퀄리티면 가성비가 좋은 편이었다.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와도 합이 좋았다.
용의 머리 형상을 한 바위인 용두암. 용궁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하려고 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바위가 돼 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온다.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의 높이는 10m, 바다에 잠긴 부분의 길이는 30m쯤 된다. |
용두암까지는 도보로 갈 수 있었다. 용두암은 이미 잘 알려진 관광지로 용담동 해안에 위치한다. 용연구름다리를 건너서 갔다. 용연은 계곡 물이 유입되는 하천인데 바다와 이어져 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으로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해 비를 내리게 했다는 설이 내려온다. 출렁다리로 연결된 용연구름다리에 올라서니 우거진 나무숲과 에메랄드빛 계곡의 경관이 펼쳐졌다. 다리를 건넌 후에는 돌담길이 나왔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노란 꽃, 푸르른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이었다.
해안쪽으로 걸어가니 용의 머리 형상을 한 바위, 용두암이 보인다. 바다 위로 우뚝 솟아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의 높이가 10m, 바다 속에 잠긴 몸의 길이가 30m쯤 된다. 원래 용궁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하려고 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바위가 돼 버렸다고 한다. 용의 한과 설움 때문일까. 파도가 강하게 몰아친다. 천지개벽이 이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용이 '우르르' 울부짖으며 바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했다.
숙소에 짐을 놓고 공책과 볼펜, 지갑만 들고 다시 나왔다. 인근에 위치한 카페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는 학교를 마치고 나온 듯한 인근 학교 학생들로 붐볐다. 젊은 시민의 경우 제주 방언을 구사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다. 카페에 들어와선 공책을 펼쳤다. 홀로 하는 여행의 매력은 낯선 곳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때론 사진보다 글이 더욱 풍부한 기록을 남긴다. 사진은 순간을 고정하지만, 글은 감정과 그 감정을 느낀 배경까지 세세하게 담을 수 있다. 걸으며 맞이한 제주의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서 든 감상과 생각까지 글로 남겼다. 언젠가 이번 여행을 떠올린다면 이 글을 다시 보리라 생각하면서.
일기를 쓰고 나서 옆 테이블을 보니 비어 있던 자리에 손님이 앉아 있다. 그도 혼자였다. 괜스레 반가워 말을 거니, 그는 30대의 여성인데 서울 토박이라 했다. 나는 대구에서 왔다고 밝혔고 우리는 서로의 지역에 대한 문화를 공유했다. 서울의 출퇴근 시간 교통 혼잡부터 시작해 대구의 음식까지…. 친구와 왔더라면 말을 걸 생각조차 안 했겠지만 혼자 온 여행이라 가능했다.
도두봉에서 바라본 제주 북동편 바다. 도두봉은 해발 63.5m의 낮은 오름으로 경사가 완만해 오르기 쉬웠다. 10분 정도 소요됐다. |
다음 날엔 도두동 무지개 해안도로로 향했다. 용두암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도로인데, 무지개색의 방호벽이 특징이다. 택시를 타고 입구 쪽에서 내렸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그 아래 빨주노초파남보로 칠해진 방호벽을 마주했다. 도로를 나누는 경계석이지만 파스텔 톤의 색이 더해져 작품처럼 다가왔다. 공공미술이란 무엇인가. 지역의 미관을 개선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무지개 도로도 그런 모범 사례였다. 드라이브 중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는 여행객도,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현지인도 볼 수 있었다.
20분쯤 바다를 보며 걸으니 해안선을 따라 우뚝 솟은 오름, 도두봉이다. 해발 63.5m의 이 오름은 경사가 완만해 오르기 쉽다고 하여 무작정 올랐다. 험한 길도 없었고 10분 정도 소요됐다. 오름이라 하기엔 규모가 작았지만 여러 자생식물과 바다 전망을 볼 수 있었다. 남사면은 풀밭을 이루면서 듬성듬성 해송이 있고, 북사면은 삼나무와 낙엽수 등이 어우러져 숲을 이뤘다.
전날 흑돼지를 먹으며 음주를 즐기고 나니 벌써 마지막 날이다. 10월 초의 한라수목원은 한적했다. 단풍이 물들지도, 형형색색의 꽃이 피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숲속은 고요한 평화로 가득 차 있었다. 청량한 공기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상쾌한 기분을 북돋아줬다. 풍경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구로 가는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몇 군데 더 돌아보자 싶어 얼마 전 방송에서 본 카페로 향했다. 이호테우 해변 뒤쪽에 있는 이 카페는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줬다. 붉은 지붕, 노란색 문, 일렬로 심어진 작은 관엽식물이 유럽의 어느 가정집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카메라 셔터를 절로 터트렸다. 카페 내부 통창에는 잔디밭 너머 이호테우 해변이 비춰졌다. 모래를 안은 해변까지 산책하고 나서 공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제주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나에겐 차도, 같이 온 친구도, 많은 돈도 없었다. 이 여행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그 덕에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맞이했다. 자연 속에서 홀로 자유로움과 평화를 느끼고, 걷고 또 걸으며 나와 내 일상을 돌아보고, 처음 본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까지 뚜벅이로 홀로 떠났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언젠가 이 새로운 모험을 또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제주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눈을 붙였다.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조현희 기자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주말섹션과 연극을 담당하고 있습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