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 아래 피아노가 있고 소나무 아래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화랑의 언덕 곳곳에 대형 의자와 천국의 계단 등의 조형물이 포토존으로 자리한다. |
길이 축축하다, 비도 오지 않는데.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본다. 바짝 다가서있는 산의 정상부가 부옇다. 안개 많은 곳이라는 표지판을 지난다. 원래 축축한 날이 많은 길이고, 오늘이 그 날들 중의 하루인가 보다. 비교적 뽀송한 산내면소재지를 관통해 다시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길을 달린다. 가도, 가도 산이요 봐도, 봐도 하늘뿐이라는 '산속의 고을' 산내면을 실감한다. 도로변 저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흐르던 동창천이 모습을 드러내면 천 건너 산길에 접어든다. 길은 '수의길', 생각보다 거칠다.
◆ 숨어 살던 깊은 골
산은, 경주에서 제일 높다는 단석산(斷石山)이다. 경주시 건천읍과 산내면에 걸쳐 있고 신라시대에는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과 청도를 거쳐 경주로 오던 길목이다. 원래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으로 신라의 화랑들이 이 산에서 수련했다고 전한다. 이런 거칠고 외로운 산길에도 띄엄띄엄 집들이 있고 마을이 있다. '상목길'이 분기하는 동구를 스친다. '자연치유'라는 문구를 얼핏 본다. 마을 초입 일대는 진목마을, 더 깊은 곳이 상목마을이다. 상목은 임진왜란 때 개척된 마을이고 진목은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교인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전쟁과 박해를 피해 숨 죽여 살던 이들의 땅은 이제 휴식과 치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열려 있다.
진목정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의 청록색 돔을 지난다. 구름이 심상찮아 멈추기를 포기한다. '대왕의 꿈' 촬영지라는 커다란 안내판을 쌩하니 외면하고 진각종 산내수련원 입구를 천천히 보낸다. 진각종. 해방 이후 생겨난 불교의 한 종파라는 것과 경주의 위덕대, 대구의 심인 중고등, 서울의 진성 중고등학교가 부설 교육기관이라는 것 정도 알고 있다. 진각종은 2021년에 단석산 일대 47만평 부지를 매입해 산내수련원을 개관했다. 아픈 사람들이 머물다 가곤 한다는데 일반인도 가능하다고 한다. 우거진 가로수 사이로 점차 하늘이 열린다. 작은 저수지가 나타나고, 푯말이 서 있다. '여기 화랑의 언덕 맞아요.'
◆ 수의지
차 문을 연다. 어, 시원하네. 몇 걸음 걷는다. 묵직한 바람이 가슴팍을 민다. 이 추운 느낌이 정녕 사실인가. 연못에 수련이 가득하다. 연못가 오래된 벚나무 아래 하얀 테이블과 주황색 포토 프레임 등이 설치되어 있어 온갖 초록 가운데 도드라진다.
삼국사기나 동국여지승람에 신라의 화랑 김유신이 17세 때 홀로 단석산 석굴에 들어가 수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한 노인이 나타나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하며 '만약 불의(不義)한 일에 사용한다면 도리어 앙화를 받을 것이다'하고 떠나니 유신은 '반드시 수의(守義)하겠노라' 맹세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구전되어 오는데 김유신은 따르는 무리 60여 명과 함께 단석산에서 수련하였고 타고 다니던 말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함께 못을 파고 '수의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연못이 수의지다. '수의길'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연못 안에 섬이 있다. 수목이 아름답게 자라난 납작한 섬이다. 섬 안에 석탑이 보인다. 오오,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 않나. 총총 입구로 돌아가 물어보니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신다. "만든거예요."
◆ 화랑의 언덕
곳곳에 놓인 파란 카누에 풀들이 자란다. 어린이 놀이터의 풀숲 속에는 트랙터 기차가 멈춰 있다. 저 멀리 기울어진 풀밭에 있는 갈색 솜뭉치는 양인가? 층운이 두껍게 퍼져 조급증이 난다. 약간 무서운 형상의 악사들과 조금 고단해 보이는 어린왕자를 지나 푸른 언덕에 오른다. 초지를 둘러싼 숲으로부터 바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풀냄새가 좋다. 이른 아침 잔디를 깎은 가지런한 흔적이 등성이를 따라 희미하게 나 있다. 단석산의 남쪽 자락, 이곳이 '화랑의 언덕'이다. 이곳은 2019년 아이돌 그룹 핑클이 출연한 JTBC 캠핑클럽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당시에는 'OK그린'이라는 복합 청소년 수련시설로 운영되었는데 방송 이후 방문객이 불쑥 찾아오거나 문의 전화가 늘면서 일반에 개방을 시작했다. 더 이전에는 목장이었다. 십수 년 전을 되돌아보면, 그때도 목장이었지만 잡초가 자라는 고원이었을 뿐 양 떼도, 소 떼도 볼 수 없었다. 화랑들의 시대에는 얼마나 야성적이었을까.
푸른 언덕에 멋들어진 나무들이 서있다. 그네를 매달고, 누울 만 한 평상과 걸터앉을 만 한 큰 바위에 그늘을 드리운다. 화랑의 언덕은 피크닉 명소다. 휴일이면 돗자리나 간이의자, 먹거리를 싸들고 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무그늘을 차지한다. 초지의 한 쪽은 골프장으로 할애되어 있다. 멀리 몇몇 사람이 골프채를 휘두른다. 언덕아래 파란 지붕은 목장 건물이다. 실제로 양들이 산다고 한다. 갈색 솜뭉치는 양이 확실하다. 숲의 우듬지를 뚫고 솟은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은 원래 전망대였다고 한다. 오래 방치되어 있다가 1층은 숲속 도서관이 되었다. 지난 6월의 일이다. 전국의 진각종 소속 도량에서 기증한 도서 6천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2층은 안전문제로 개방하지 않고 있는데 정비를 통해 내년에 개방할 예정이라 한다. 숲 입구에서 '뱀조심' 문구를 보고 돌아선다.
◆ 이런 풍경 처음 봐
화랑의 언덕을 둘러싼 숲 가운데에 동굴 같은 허(虛)가 있다. 엄청난 바람이 새어나오는 빈 공간이다. 알리바바의 거대한 돌문을 열 듯 바람을 밀고 들어서면 굉장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천 길 낭떠러지에 부유한 듯 앉은 바위 아래로 산과 다랑이 논에 둘러싸인 마을이 둥지처럼 자리한다. 내남면 비지리의 학동마을이다. 봄 모내기 전 무논에 아침햇살 내려앉은 풍경과 가을의 황금빛으로 유명하다. 아직 논은 푸르다.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이삭이 탱글탱글 여물어가는 시간이다. 바위는 명상바위라 불린다. '캠핑클럽'에서 이효리가 이 바위에 앉아 방백처럼 말했다. "이런 풍경 처음 봐." 바람이 너무 거세어 바위에 앉지는 못하지만 풍경은 꿈쩍없이 장하다.
벚나무 아래 피아노가 놓여 있다. 어제의 비를 고스란히 맞았을 피아노는 참 처연히도 아름답다. 흰 건반은 풍경처럼 꿈쩍도 않는다. 미 플랫, 시 플랫, 도 샵, 검은 건반 몇 개만이 겨우 단말마의 소리를 낸다. 열린 위판으로 발돋움 해 속을 들여다본다. 하얀 해머 위에 벌레 먹은 싱싱한 이파리가 누워 있다. 이 언덕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참 좋겠다. 갑자기 흰 구름 위로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다. 층운은 더욱 두꺼워졌고 양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보는 것은 풀과 나무와 숲과 언덕과 연못이 전부다. 이런 풍경은 처음이고, 아주 먼 곳에서 방랑하는 사람처럼 흡족하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내려오는 산길이 뿌옇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경주방향으로 가다 건천IC에서 내린다. 톨게이트 앞에서 우회전해 청도 방향 20번 국도를 타고 직진, 산내네거리에서 언양 방향 921번 지방도를 타고 직진한다. 약 3㎞정도 가다 OK그린 청소년수련원 입간판이 보이면 좌회전해 소태교 건너 우회전해 산길 따라 6.7㎞정도 계속 가면 된다. 경주 화랑의 언덕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입장료는 36개월 이상 1인 2천원, 애견 동반도 가능하며 1견당 2천원이다. 주차비는 없다. 화랑의 언덕 일대는 진각종 산내수련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관람 시간 내에 산책과 피크닉만 가능하고 캠핑이나 차박은 불가능하다.
◆ 숨어 살던 깊은 골
산은, 경주에서 제일 높다는 단석산(斷石山)이다. 경주시 건천읍과 산내면에 걸쳐 있고 신라시대에는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과 청도를 거쳐 경주로 오던 길목이다. 원래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으로 신라의 화랑들이 이 산에서 수련했다고 전한다. 이런 거칠고 외로운 산길에도 띄엄띄엄 집들이 있고 마을이 있다. '상목길'이 분기하는 동구를 스친다. '자연치유'라는 문구를 얼핏 본다. 마을 초입 일대는 진목마을, 더 깊은 곳이 상목마을이다. 상목은 임진왜란 때 개척된 마을이고 진목은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교인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전쟁과 박해를 피해 숨 죽여 살던 이들의 땅은 이제 휴식과 치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열려 있다.
진목정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의 청록색 돔을 지난다. 구름이 심상찮아 멈추기를 포기한다. '대왕의 꿈' 촬영지라는 커다란 안내판을 쌩하니 외면하고 진각종 산내수련원 입구를 천천히 보낸다. 진각종. 해방 이후 생겨난 불교의 한 종파라는 것과 경주의 위덕대, 대구의 심인 중고등, 서울의 진성 중고등학교가 부설 교육기관이라는 것 정도 알고 있다. 진각종은 2021년에 단석산 일대 47만평 부지를 매입해 산내수련원을 개관했다. 아픈 사람들이 머물다 가곤 한다는데 일반인도 가능하다고 한다. 우거진 가로수 사이로 점차 하늘이 열린다. 작은 저수지가 나타나고, 푯말이 서 있다. '여기 화랑의 언덕 맞아요.'
◆ 수의지
김유신과 낭도가 함께 팠다는 수의지. 연못가 오래된 벚나무 아래 하얀 테이블과 주황색 포토 프레임 등이 설치되어 있어 온갖 초록 가운데 도드라진다. |
삼국사기나 동국여지승람에 신라의 화랑 김유신이 17세 때 홀로 단석산 석굴에 들어가 수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한 노인이 나타나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하며 '만약 불의(不義)한 일에 사용한다면 도리어 앙화를 받을 것이다'하고 떠나니 유신은 '반드시 수의(守義)하겠노라' 맹세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구전되어 오는데 김유신은 따르는 무리 60여 명과 함께 단석산에서 수련하였고 타고 다니던 말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함께 못을 파고 '수의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연못이 수의지다. '수의길'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연못 안에 섬이 있다. 수목이 아름답게 자라난 납작한 섬이다. 섬 안에 석탑이 보인다. 오오,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 않나. 총총 입구로 돌아가 물어보니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신다. "만든거예요."
◆ 화랑의 언덕
어린이 놀이터의 풀숲 속에는 트랙터 기차가 멈춰 있다. 과거 'OK그린'이라는 복합 청소년 수련시설로 운영되다가 일반에 개방되었으며 현재는 진각종 산내수련원에 속해 있다. |
푸른 언덕에 멋들어진 나무들이 서있다. 그네를 매달고, 누울 만 한 평상과 걸터앉을 만 한 큰 바위에 그늘을 드리운다. 화랑의 언덕은 피크닉 명소다. 휴일이면 돗자리나 간이의자, 먹거리를 싸들고 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무그늘을 차지한다. 초지의 한 쪽은 골프장으로 할애되어 있다. 멀리 몇몇 사람이 골프채를 휘두른다. 언덕아래 파란 지붕은 목장 건물이다. 실제로 양들이 산다고 한다. 갈색 솜뭉치는 양이 확실하다. 숲의 우듬지를 뚫고 솟은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은 원래 전망대였다고 한다. 오래 방치되어 있다가 1층은 숲속 도서관이 되었다. 지난 6월의 일이다. 전국의 진각종 소속 도량에서 기증한 도서 6천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2층은 안전문제로 개방하지 않고 있는데 정비를 통해 내년에 개방할 예정이라 한다. 숲 입구에서 '뱀조심' 문구를 보고 돌아선다.
◆ 이런 풍경 처음 봐
수천 길 낭떠러지에 부유한 듯 앉은 명상바위 아래로 산과 다랑이 논에 둘러싸인 내남면 비지리의 학동마을이 둥지처럼 자리한다. |
벚나무 아래 피아노가 놓여 있다. 어제의 비를 고스란히 맞았을 피아노는 참 처연히도 아름답다. 흰 건반은 풍경처럼 꿈쩍도 않는다. 미 플랫, 시 플랫, 도 샵, 검은 건반 몇 개만이 겨우 단말마의 소리를 낸다. 열린 위판으로 발돋움 해 속을 들여다본다. 하얀 해머 위에 벌레 먹은 싱싱한 이파리가 누워 있다. 이 언덕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참 좋겠다. 갑자기 흰 구름 위로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다. 층운은 더욱 두꺼워졌고 양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보는 것은 풀과 나무와 숲과 언덕과 연못이 전부다. 이런 풍경은 처음이고, 아주 먼 곳에서 방랑하는 사람처럼 흡족하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내려오는 산길이 뿌옇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경주방향으로 가다 건천IC에서 내린다. 톨게이트 앞에서 우회전해 청도 방향 20번 국도를 타고 직진, 산내네거리에서 언양 방향 921번 지방도를 타고 직진한다. 약 3㎞정도 가다 OK그린 청소년수련원 입간판이 보이면 좌회전해 소태교 건너 우회전해 산길 따라 6.7㎞정도 계속 가면 된다. 경주 화랑의 언덕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입장료는 36개월 이상 1인 2천원, 애견 동반도 가능하며 1견당 2천원이다. 주차비는 없다. 화랑의 언덕 일대는 진각종 산내수련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관람 시간 내에 산책과 피크닉만 가능하고 캠핑이나 차박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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