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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장근 작가의 대표 작품. <배장근 작가 제공> |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한다. 경험과 지혜가 쌓여 어떤 상황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피 끓던 청춘의 다양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 얻은 경험을 갈무리하며 편안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진지한 시기로 여겨진다. 인생을 축구 경기에 비유한다면 이제 후반전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17년차 방송국 그래픽 디자이너인 배장근(41) 작가는 사뭇 다르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AI를 강력한 제작 도구로 여긴다.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마주할 수밖에 없던 한계를 깰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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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영상으로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고민해야 했어요. 준비 과정과 시간, 인력, 필요한 그래픽 기술을 먼저 고려하고 실제 가능성을 따져봐야 했죠. 하지만 지금은 만들고 싶은 영상의 스타일, 분위기, 장소 등을 고민 없이 상상한 대로 표현할 수 있어요."
배 작가에게 AI는 단순히 시간을 절약해 주는 편리한 도구를 넘어 머릿속에 머물렀던 상상력을 현실로 끌어내는 촉진제다. AI가 열어준 새로운 창작의 문은 그의 인생에서 창작활동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하게 했다.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기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들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됐거든요. 과거에는 시작조차 못했을 작업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건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됩니다."
배 작가는 AI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2023년 처음으로 AI 생성 이미지를 접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머릿속으로 상상한 내용을 글로 작성한 프롬프트에 따라 AI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후 작업에 필요한 AI 도구를 가리지 않고 탐구하며 숙련도를 쌓았다. AI는 그의 업무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회적 이슈의 재연이나 가상 시뮬레이션 제작 시간을 단축할 때 AI를 활용했다. "3D 모델링의 에셋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경우 생성형 AI로 배경과 인물을 만들어서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17년차 방송국 그래픽 담당
제작 가능성 고민 한계 깨고
머릿속 상상대로 표현 가능해
재연·시뮬레이션 제작 활용
리얼한 탓 실물확인 해프닝도
"AI기술 보편화로 문턱 낮아져
창작자 개성이 차별점 될 것"
AI로 생성한 결과물이 너무 리얼한 탓에 생긴 해프닝도 있었다. AI로 제작한 재연 영상이 송출되기 직전 편집부서에서 급히 실제 인물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AI로 생성한 인물의 뒷모습에 실루엣 처리를 했는데도 '이게 실제 사람이냐'며 물어 왔어요. 결국 필터로 실사 느낌을 줄이고 '삽화' 자막을 추가했죠."
이를 계기로 그는 AI 결과물을 활용할 때 맥락에 맞게 신중하게 다뤄야 함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AI의 강점을 극대화하되, 결과물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연출하는 것이 AI산업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켜켜이 쌓아올린 경험은 배 작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그는 페이스북의 AI 크리에이터 커뮤니티 '스테이블 디퓨전 코리아(SDK)'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AI툴의 기능과 자신만의 노하우를 담은 책자를 집필 중이다.
배 작가는 인간과 AI의 관계를 '스토리텔러와 도구'로 정의한다. AI가 2D·3D, 시뮬레이션, 편집 등 다양한 기능을 아우르는 도구로 발전했지만,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거나 이미지와 영상을 결합해 완성품을 만들진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상상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AI를 이끄는 리더 역할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AI시대에 창작자의 역량을 키우려면 호기심을 잃지 않고 배우는 태도가 중요해요.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인간적 통찰을 더할 수 있는 폭넓은 관심과 공부가 필요하죠. 인문학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 그는 사실적인, 완벽한 이미지를 넘어 매력적인 서사를 담은 작품에 도전할 계획이다. AI 기술 발전으로 누구나 고퀄리티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평준화한 환경에서 '창작자의 개성'이 차별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도 전·후반전이 있다. 축구는 전반전에서 점수차를 냈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반전에 점수를 내지 못했다고 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지만 축구의 진짜 묘미는 후반전의 역전승이다. 창작의 필드 위에서 배 작가가 거두게 될 역전승이 기대된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손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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