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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하 한국농촌창업진흥원장 |
며칠 전 방문했던 한 산불 피해 마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민들은 평생 일궈온 집과 일터가 한순간에 사라진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반복되는 재난 앞에서 우리는 지금의 국토 공간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농촌은 이미 인구 감소, 고령화, 지방소멸이라는 복합적 위기를 맞고 있다. 산간 마을엔 빈집이 늘어나고 있고, 남아있는 주민 대부분은 고령층이다. 필자는 주민역량강화사업 추진을 위해 농촌 현장을 자주 방문하는데,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얼마 전 지역의 한 어르신은 "여기서 불이 나면 어디로 피해야 할지, 구조대가 제때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이 한마디가 농촌이 처한 현실적 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분산된 농촌의 주거 형태는 재난 발생 시 구조와 대응을 어렵게 하고, 행정력과 예산의 효율적 운용에도 부담을 준다. 따라서 이제는 산림 인근 지역에 일정 거리 이상 주거용 건축을 제한하고, 위험지역 주민들이 안전한 시군 중심지로 점진적으로 이전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유도할 필요가 있다.
중심지로의 주거 이전은 단순히 재난을 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군 중심지는 의료, 교육, 교통, 통신 등 필수 공공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돌봄 서비스와 응급 대응 체계도 더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주민들은 더 안전하고 안정된 일상을 누릴 수 있고, 지방자치단체도 인력과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국토 리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국토 리디자인이란 인구구조 변화와 재난 위험성을 반영해 주거와 인프라를 전략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단순히 기반시설 정비나 행정구역 조정을 넘어, 국토 공간의 근본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보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창의적으로 재설계하여, 새로운 정주 구조와 공간 활용의 중심축을 만들어야 한다.
해외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국토교통성과 총무성을 중심으로 고령화와 지방소멸에 대응하기 위해 중산간 지역을 '중점 유지 지역'과 '관리 유보 지역'으로 구분하고, '소지역 거점' 중심으로 인구와 기능을 재편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인프라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집중시켜 재난 대응력을 높이려는 시도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는 '지방을 살리자'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과 실천이다. 농촌과 지방을 지킨다는 것이 모든 마을을 무조건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 변화에 맞춰 지속 가능하고 안전한 형태로 국토 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도시와 농촌, 수도권과 지방 간 역할 재정립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재난이 반복될 때마다 겪는 비극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토를 '보존'과 '변화'라는 두 축으로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다. 국토 리디자인이야말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다. 이 논의가 국가적 의제로 본격화되길 기대한다.
전영하 한국농촌창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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