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8] 문화재 마을 구미 일선리

  • 입력 2003-07-07 00:00   |  수정 2003-07-07
[마을 .8] 문화재 마을 구미 일선리

구미시해평면 일선리.

안동 임하댐 수몰민이던 명문가 전주(全州) 류씨 (柳氏)들이 1987년부터 이주한 현대식 집성촌이다.

구미시 선산읍에서 상주시로 연결되는 국도 33호를 따라 가다가 선산읍 생곡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낙동강에 놓인 일선교를 건너 직진하면 우측에 보이는 첫번째 마을이 일선리이다.

바둑판처럼 구획된 마을 외관만 봐도 최근에 조성된 동네임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어귀 중앙에 4m가량 높이로 우뚝 솟은 ‘수류우향(水柳寓鄕)’ 비 석에 새겨진 글은 마을의 탄생배경을 알려준다.

비문은 ‘우리 전주 류씨는 여초(麗初) 대승공(大丞公) 휘(諱) 차달(車達)의 후(後)로서… 안동 수곡에 400여년 세거해 오다가 임하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70여호가 이 곳으로 내주(來住)하다’고 기록돼 있다.

1980년대 안동군 임동면 수곡, 박곡, 무실 등지에 흩어져 살던 전주 류씨들은 임하댐 건설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이 수몰되자, 고향을 뒤로 하고 일선리를 제2의 고향으로 선택했다.

임동면내 전주 류씨 500가구 중 73가구가 이 마을로 옮겨와 전주 류씨 집성촌으로 형성된 것.

일선리는 그 당시 선산군 도개면 신림리와 해평면 낙산리 경계선에 놓 여있던 밭과 야산이었다.

정부는 1986년 11월 국비 61억1천420만원과 주민 자부담 28억7천420만원을 들여 2만6천458평을 마을로 개발하는 공사를 착공, 다음해 12월에 준공했다.

마을이 조성되자 1987∼88년 2년에 걸쳐 주민들 이 입주했다.

마을앞 낙동강변 유휴지 83.2ha를 농지로 조성하는 사업도 86년 12월 착공, 88년 12월 완공돼 이주민들에게 0.8ha씩 분양됐다.

고향인 안동군 임 동면에 살면서 벼농사와 함께 고추, 담배농사를 짓던 이주민들에게 농사는 천직이자 생계수단.

그러나 강변 모래밭을 일군 척박한 논에서 처음부터 농 사가 잘 될리 없었다.

이 때문에 농사를 짓느라고 주민 모두가 많은 고생 을 했다.

주민들은 예천, 상주 등지를 다니면서 이주할 장소를 물색하던중 낙동강 변에 위치한 일선리를 선택했다.

그 당시 이주단지를 선정하고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류해종씨(75)는 “지관까지 불러 이주단지로 조성할 마을의 형세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일선리는 뒤편에 태조산, 앞에 낙동강이 있어 전형적 인 배산임수 지형인데다 좌청룡 우백호까지 곁들여진 천혜의 지형”이라고 자랑을 했다.

“마을 명칭도 낙동, 하동 등 여러 가지로 궁리하다가 결국 신라시대 선산군의 지명인 일선리를 선택했지요.

마을명칭을 일선리로 정하자 한동안은 선산군 토박이 주민들이 일선리라는 이주마을 명칭에 대해 언짢은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시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류씨는 지명을 정할 당시 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주 류씨들은 안동에서 선산으로 이주한 이주민이지만 명문가다운 모습 을 잃지 않고 있다.

비록 조성된지 15∼16년밖에 안된 마을이지만 수백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가 10여점이나 있다.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문화재도 함 께 옮겨왔기 때문이다.

일선리 주민들은 명문가의 후예로서 유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다.

마을 회관에 있는 경로당은 선산지역 유림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고 있다.

선산향교 박기후 전교(78·선산읍 신기리)와 박 전교에 앞서 전교를 역임한 김원환옹(81·도개면 도개리)이 일선리 경로당으로 매일 출근을 하다 시피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구미시내 대표적인 서원인 금오서원과 동락서원 원장인 류용훈옹(80)이 거주하는 등 유학을 숭상하는 마을 분위기가 유림 들의 마음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조상대대로 뿌리 깊은 유학전통속에서 성장한 일선리 주민들은 아직도 조상숭배, 경로사상, 학문숭상, 예절준수 등의 정신이 남다르다.

경로당을 찾는 노인들은 지금도 서로 큰절을 하면서 인사를 나눈다.

일선리 전주 류씨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회관에 어른들을 모셔놓고 합동세배를 드린다.

정월 초엿새면 어김없이 고향에 있는 기양서원 (起陽書院)을 찾아 배알하고 문중회의에도 참석한다.

또 음력 10월 초하루에 는 임동면 망천리 문중재실에 모여 시제를 올리는 등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주한지 15년에 불과하지만 일선리 주민들은 인재도 많이 배출했다.

류 원식씨(70)는 “일선리로 이주한 전주 류씨들은 행정고시와 기술고시 합격자 를 각각 2명씩이나 배출하고 대학교수도 길러냈다”고 자랑했다.

“일선리 주민의 집을 빌려 사는 일부 세입자들은 이러한 교육적인 마을 분위기가 좋아 몇년씩 계속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류씨는 귀뜀했다.

이 마을도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은 대부분 직장을 따라 도 회지로 나가고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주 당시 73가구였던 전주 류씨 일족은 현재 60여 가구로 줄었다.

주민들도 대부분 60∼80대 노인들이 다.

일선리 이주민들은 이 곳에 15년이상 살았고, 고향에 비해 교통과 생활 여건은 좋지만 그래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옛 선현들이 수구지심(首丘之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로당에 모인 노인들 은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정들면 고향이라지만 나이가 들수록 죽마 고우가 그리울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수몰지서 옮겨온 문화재 일선리앞 국도 25호 옆에는 ‘일선리 문화재마을’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 있다.

비록 조성된지 15년밖에 안된 짧은 역사를 가진 마을이지만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조상대대로 간직해왔던 10여점의 문화재도 함께 옮겨 와 새로운 문화재마을을 형성했다.

용와종택(傭窩宗宅)과 침간정(枕澗亭)(경북도 민속자료 18호)은 숙종과 영 조때 학자인 류승현(1680∼1746) 선생이 살던 집과 학문을 가르치던 정자로 구성돼 있다.

1710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건립됐으나 임하댐 건설로 구 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전됐다.

삼가정(경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50호)은 류봉시 선생(1654∼1709)이 두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학덕을 갖춰 높은 관직에 이르자 정자를 짓고 세 그루의 가죽나무를 심어 삼가정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안동시 임동면 박곡 리에서 이전됐다.

임하댁(경북도 문화재자료 53호)은 조선 영조때 공조참의를 지낸 류승현(柳升鉉) 선생의 후손이 지은 집이다.

일선리에는 그밖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1호 수남위종택(水南位宗宅), 경 북도 문화재자료 54호 대야정, 경북도 문화재자료 55호 근암고택(近庵古宅), 경북도 문화재자료 57호 호고와종택(好古窩宗宅), 경북도 문화재자료 58호 만령초당(萬嶺草堂),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62호 동암정(桐巖亭) 등이 있다.

/김연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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