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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함양비빔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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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제일비빔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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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황등비빔밥 |
◆ 비빔밥을 위한 프롤로그
‘섞는다. 비빈다. 만다. 포갠다.’
복수의 식재료가 제3의 맛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흐름을 타고 있는 말들이다.
우린 비빔밥을 너무 ‘국수주의적’으로 옹호하려고 한다.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한국밖에 없다면서 배타적 지위를 너무나 오래 누렸지 않은가. 오직 한국만의 비빔밥이 아니라 ‘비빔요리의 강국’ 정도로 정리해도 될 듯 싶다. ‘비빔밥, 서양에는 없다’는 말이 맞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비슷한 게 수두룩하다.
브라운 소스의 대명사격인 데미글라스(Demiglace) 소스는 꼭 ‘액체 비빔밥’같다.
데미글라스는 브라운 소스를 절반으로 졸인 소스를 말한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당근, 양파, 샐러리 등을 볶다가 밀가루를 넣고 갈색이 날 때까지 다시 볶는다. 여기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고 볶다가 사골육수 같은 비프 스톡을 붓고 약한불에서 끓인다. 소스가 끓기 시작하면 토마토와 향신료를 넣고 약한 불에서 부피가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끓이다가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한다.
이밖에 일본의 ‘돈부리(덮밥)’는 물론, 이탈리아 ‘리조토’, 스페인의 해물비빔밥인 ‘파에야(Paella)’, 프랑스 프로방스식 해물탕인 ‘부야베스(Bouillabaisse)’, 멕시코의 ‘타코(Taco·옥수수로 만든 납작만두 같은 빵에 온갖 식재료를 넣은 멕시코형 샌드위치)’, 미국의 햄버거와 스튜, 일본의 샤부샤부와 스키야키, 중국의 ‘춘권’ 등도 우리의 비빔밥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의 경우 정조가 사색당파를 없애기 위해 기획했던 모듬묵요리인 탕평채, 김치밥국의 일종인 갱시기 등도 비빔밥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서울의 대표적 음식칼럼니스트 황광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요즘 주간한국에 한식 얘기를 식품사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최근 비빔밥의 역사를 정리했다. 밑줄 그을 만한 대목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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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역사의 함양집 4대 주인인 강태원·윤희 부부. 70년대초부터 사용하는 봉화유기그릇(위부터). |
비빔밥을 골동반(骨董飯)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비빔밥과 골동반은 다른 음식’이라고 주장했다.
“골동반은 중국 음식이고 역사가 퍽 오래된 것입니다. 비빔밥의 한자 표기는 골동반이지만 그러나 ‘골동반=비빔밥’은 아니죠.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야외에 나갈 때 준비했던 ‘반유반(盤遊飯)’이란 음식이 골동반의 일종인데, 밥을 지을 때 생선이나 고기 등을 미리 넣고 쌀을 안친 것입니다. 중국골동반은 일본의 ‘가마메시(釜飯)’와 거의 흡사해요. 일종의 솥밥이죠. 쌀을 안칠 때 육수를 넣고, 작은 가마솥 위에 새우나 작은 생선 등을 얹습니다. 나중에 작은 푸른나물 등을 얹어서 내온다. 문제는 먹는 방식이죠. 가마메시는 절대 비벼먹지 않습니다. 가마메시나 골동반은 정해진 대로 재료를 넣고 밥을 짓죠. 비빔밥과는 전혀 다른 ‘닫혀 있는 음식’입니다. 비빔밥처럼, 먹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대로 깔끔하게 떠먹는 방식이죠.”
◆ 원칙에서 벗어난 전주비빔밥
그러면서 그는 “전주비빔밥은 조선 때 없던 말이다. 비빔밥은 중국에서 건너왔다. 현재 전주비빔밥은 비빔밥의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황씨는 산나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 또한 제철 즉석요리를 마치 퍼포먼스처럼 펼치는 안동 출신의 ‘방랑식객’임지호씨를 주목했다. 경기도 양평 본점에 이어 서울 청담동에 낸 산당 2호점에서 만났으며, 임씨의 비빔밥 철학에 공감을 했단다. ‘산당표 비빔밥’을 연구중인 임씨는 “오리지널 비빔밥에는 절대 고추장이 들어가선 안 되고 고춧가루를 넣어야 원칙이다. 고추장은 밥 위에 올라간 식재료의 독특한 맛을 다 가린다”고 말했단다.
고추장 대신 고춧가루를 사용하자는 주장에 대해 전주 비빔밥 관계자들은 기겁을 한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관계자의 끝장토론이 필요할 것 같다.
임씨의 고향은 경북 안동. 그래서 그는 고추장 대신 지렁으로 간을 맞춘 헛제사밥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고추장 비빔밥은 어느 날 국내 식당가를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비빔밥문화를 후퇴시킨 측면도 분명 있다고 본다. 이것저것 넣고 고추장 넣고 비빔밥이라. 고추장 범벅된 비빔밥은 90년대 공장제 고추장이 전국을 강타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추장이 흔해지니 온 데 고추장 투성이였다.
황씨는 전주에서 철칙으로 여기는 황포묵(해남산 치자로 노랗게 물들인 청포묵)도 윤활성을 좋게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묵이 안들어가도 사골로 밥을 짓지 않아도 보탕국만 조금 넣어도 잘 비벼진다고 했다.
“조금 뻑뻑하면 보탕국을 조금 넣으면 밥이 잘 움직입니다. 전주에선 각 채소 등을 식용유로 볶는데 이는 헛제사밥의 삶은 채소에 비해 소화가 잘 안되죠.”
그런데 황포묵에 대한 기자의 생각은 그와 다르다. 전주비빔밥의 경우 날계란 대신 묵을 넣는 게 더 낫다고 본다. 계란의 비린내가 옥에 티가 될 수 있다. 묵은 ‘연골’이라고 본다. 근육 같은 여러 식재료가 잘 돌아가게 만든다.
비빔밥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고조리서인 ‘시의전서’. 거기에조선조 비빔밥의 레시피가 노출된다.
‘고기는 재워서 볶고 간납(부침개)을 부쳐서 썬다. 각색(여러 종류)나물을 볶아놓고 좋은 다시마 튀각을 부숴서 놓는다. 밥에 만든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계란지단을 부쳐서 골패 짝만큼씩 썰어 얹는다. 고기완자는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은 잡탕국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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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비빔밥 |
◆ ‘현존 最古’ 함양집 비빔밥
그동안 전주비빔밥과 진주비빔밥이 유명세를 날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 된 식당이 자동차의 도시인 울산에 있었다. 바로 울산시 남구 신정3동에 있는 함양집이다. 일요일이라서 문을 닫는 날이었지만 기자가 찾은 날 4대 주인 강태원·윤희 부부가 일부러 비를 뚫고 본점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 벽 상단에 나란히 걸린 역대 사장 할머니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부산 밀면의 종가격인 부산 내호냉면 벽에도 지난 주인 할매 사진이 걸려있다.
대구도 최소한 이런 근성을 배워야겠다. 1대는 강분남 할매, 그 딸인 안숙희 할매가 2대, 3대는 그 며느리인 황화선 할매, 4대는 첫째딸 윤희씨 내외가 나란히 이어왔다. 10년전에 둘째딸 윤정아씨가 남편 이준승씨와 함께 달동 직영점을 꾸려가고 있다. 혈족들이 비빔밥을 수호하고 있는 대목이 너무 보기 좋았다. 특히 10년전부터 본점 여사장의 친정어머니가 사돈과 함께 주방일을 보고 있다.
일단 봉화유기를 쓴다는 게 대단해 보인다. 한때는 스테인리스 용기도 사용했지만 이게 아니다 싶어 75년부터 유기를 사용하고 있다. 놋그릇은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다. 프로근성이 없으면 감히 엄두를 못낸다. 4개월마다 수세미로 반질거리게 닦는다. 맛을 위해 놋그릇 온도를 50~57℃에 맞춘다.
함양집의 비빔밥은 전북 함평의 화랑식당과 전남 익산군 황등리 진미수퍼의 히트 메뉴인 ‘육회비빔밥’과 동일계열이다.
고추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밥과 나물의 비율은 1대 2.5로 맞춘다. 고사리, 무나물, 시금치, 콩나물, 미나리만 사용한다. 철이 되면 미역도 썰어넣는다. 쌀은 의성 안계쌀, 김도 들어가는데 맛소금이 들어간 공장김이 아니라 직접 완도김을 연탄불에 구워서 부숴낸다.
고추장도 공장용과 거리가 있다. 일단 질금물을 체에 걸러내 물을 내고 이를 불에서 걸쭉하게 만들고 거기에 고춧가루와 된장을 넣어 만든다. 맛을 위해 미리 재료를 담아두지 않는다. 그러면 밥이 퍼지기 때문이다.
보탕국은 무, 두부, 쇠고기, 조갯살, 홍합 등으로 빚는다. 그런데 진주비빔밥과 달리, 탕국에 선지가 없다. 육회도 한번 볶은 것과 생것, 두 종류가 있다. 고명으로 날전복 썬 것 한 조각을 올려준다. 공장 고추장을 그대로 넣은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 또한 파전과 마른 불고기, 육개장도 집의 전통에 누를 끼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된장과 간장을 직접 담그지 않는 게 흠이었다. 앞으로 부부가 함양집 비빔밥이 전국의 비빔밥과 어떻게 다른 지 한국 비빔밥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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