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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동구 신천동에 위치한 거창식당의 어탕국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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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 마을 할매가 끓인 갱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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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식 갱시기를 연상시키는 서울 강남의 따로국밥. 콩나물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게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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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식 갱시기 같은 몸국. 콩나물 대신 모자반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
기자도 어릴 때 모친이 점심 무렵 이웃 아줌마들을 불러 모아 갱시기 파티를 열 때 옆에서 한 그릇 얻어먹기도 했다. 춘궁기 나물죽이 조금 부유해진 버전으로 진화한 것 같았다.
갱시기 맛의 원천은 ‘묵은지’다. 김치찌개처럼 겉절이 김치로는 맛이 안난다. 김장 김치가 푹 삭아 시큼한 맛이 절정을 이룰 때 갱시기 맛도 절정을 이룬다. 썬 가래떡, 거기에 콩나물, 멸치 육수 등이 섞이면 진미가 나온다.
물론 하절기보다 동절기가 적격이다. 아침과 저녁은 아니고 점심 때 먹어야 제격이다. 식은 밥을 넣기도 하고 불린 살을 이용하기도 하며 소면이나 칼국수를 넣어 먹을 수도 있다.
쌀이 많이 들어가면 꼭 죽 같다. 콩나물 비중이 늘어나면 전주 콩나물국밥 같은 느낌이 든다.
응용은 무한하다. 소면 대신 묵채가 들어가면 경주의 명물 팔우정 해장국 스타일로 변주된다.
대구시 동구 신천동 옛 국제회관 동쪽 골목 안에 갱시기 전문 고령식당과 어탕국수 전문 거창식당이 마주보고 서있다.
요즘 워낙 프랜차이즈가 강세이고 올챙이 조리사들이 요리를 제대로 배우질 않고 밑반찬 마련 솜씨도 형편없어 머잖아 고령·거창 식당 같은 토속미 가득한 이런 백반집이 멸종될 것 같다.
고령식당의 별미는 콩나물갱시기. 거창식당은 거창식 어탕국수가 잘 팔린다. 이 어탕도 꼭 퓨전 갱시기 같다. 국물을 조금 맑게 하고 국수를 조금 줄이고 찬밥을 넣어 끓이면 잡어 육수를 베이스로 한 갱시기가 될 것 같다. 어탕국수 육수는 잡어, 갱시기는 멸치로 뽑아낸다.
20년전 전국 최초의 라면 전문점이란 기치를 내건 중구 남일동 중앙시네마 맞은편 골목에 자리잡은 청춘라면은 라면 사리를 이용한 ‘라면 갱시기’ 시대를 열어 10~20대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957-3번지로 가면 별난 칼국수집이 나온다. 모리국수 전문점 까꾸네이다. ‘모리’란 한꺼번에란 의미를 담고 있다. 아귀, 홍합 등 온갖 잡 해산물에 콩나물과 칼국수를 넣고 끓인다. 꼭 구룡포식 갱시기처럼 보인다.
가래떡·콩나물·멸치육수에
식은 밥이나 불린 쌀 넣어
소면·칼국수 넣어 먹기도
점심시간 때 먹어야 제격
전주 콩나물국밥과 닮은 꼴
소면 대신 묵채 쓰면 경주식
어탕국수 변신하면 거창식
가래떡 대신 감자 쓴 포항식
해산물+칼국수의 구룡포식
콩나물 대신 톳 쓰면 제주식
라면갱시기 등으로 응용돼
10∼20대 입맛 사로잡기도
◆ 노태우 전 대통령이 무척 좋아한 갱시기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때 발탁, 김영삼 대통령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 임기 초기인 98년 10월까지 청와대 주방을 책임지던 이근배씨.
그가 여성조선이라는 잡지에서 ‘대통령들의 식단’을 공개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입맛이 없는 점심 때 무척 즐겼던 음식이 바로 갱시기였다.
갱시기는 일명 ‘김치밥국’으로 불린다.
그럼 국밥과 밥국의 차이는 뭘까. 국밥은 역시 고기가 축을 이루고 밥국은 밥이 축이 된 국이다. 그런데 육수로 멸치를 많이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국은 선비들한테는 참 난감한 음식이었다. 유교적인 문화의 영향으로 그릇에 입을 대지 않는 것이 기본처럼 인식되어 왔다.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에서처럼 국은 먹는(食) 게 아니라 마시는(飮) 것이었다. 중국에서 국이란 ‘탕(湯)’을 말한다. 마라탕(麻辣湯), 싼라탕(酸辣湯), 샤러탕(蟹肉湯) 등이 있는데, 중국의 국물요리는 대부분 녹말을 풀어 걸쭉하다. 그래서 스푼으로 떠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일본어에서 탕(湯)은 ‘유(ゆ)’라고 읽으며 보통 컵라면에 부어먹는 ‘뜨거운 물’을 가리킨다. 국을 말할 때는 대신 ‘시루(汁)’로 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밥을 먹을 때 미소시루(味增汁·된장국)를 훌훌 마신다. 지역에 따라 생선맑은국도 있지만 보통 된장을 풀어 끓이는 것이 기본이다. 두부와 미역 같은 해초류를 넣은 것이 많으며, 장어 등 값비싼 특산 재료가 들어가면 가격 또한 천차만별로 올라간다.
사실 전주의 콩나물국밥과 경상도 갱시기는 너무 닮은 꼴이다. 또한 제주도에서 가장 토속미를 갖고 있는 몸국도 얼핏 제주도식 갱시기 같다. 육지 관광객들은 아직 몸국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른다. 몸국의 주 재료는 모자반(톳), 묵은지, 돼지 육수가 축을 이룬다. 잔칫날 돼지고기 삶은 물을 넣는다.
어떻게 만들까.
준비할 재료는 쌀 1컵, 김치·콩나물 100g씩, 참기름 1/2큰술, 멸치육수 5컵, 국간장(소금) 약간.
일단 쌀을 씻어 불린다. 김치는 송송 썰고 콩나물은 씻어 건진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김치와 불린 쌀을 넣어 볶는다. 콩나물을 넣고 멸치육수를 부어 센 불에서 뚜껑을 덮고 끓이다 차츰 불을 약하게 해서 쌀알이 퍼질 때까지 끓인다. 국간장이나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 포항시 죽장면에서는 감자를 넣기도
지난주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의 한 집에서 포항식 갱시기를 맛봤다.
묵은지, 콩나물, 쌀, 멸치 다시 등은 같았지만 가래떡 썬 게 없어 감자를 대신 넣어 요리를 했다. 가마솥에서 끓였는데 솥 안에 있을 때는 양이 얼마 안되는 줄 알았더니 족히 15명이 동시에 요기할 수 있었다. 가마솥 인심이 갱시기에서 피어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들도 멸치 육수와 묵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칠곡군에서는 ‘갱죽’이란 말을 즐긴다.
갱시기는 ‘국시기’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갱식이, 김치죽 등이라고도 한다.
국시기는 서민 가정에서 70년대 이전의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많은 식구들의 끼니를 때울 때 흔히 해먹던 음식이다. 당시 식구는 많고 양식은 부족했다. 그래서 양식을 조금이나마 절약하기 위해 남은 밥이나 곡식 등에 김치나 콩나물 등 기타 채소류를 듬뿍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멀겋게 끓여서 먹었다.
◆ 제주도 갱시기 몸국
제주도 토박이를 만나 ‘몸국’을 안다고 하면 더 살갑게 대해준다.
몸국에는 전라도의 홍어처럼 그들의 얼과 삶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묵은지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몸국과 갱시기는 비슷하다. 콩나물 대신 모자반(톳)을 넣으면 몸국으로 변한다.
제주도에서는 모자반을 ‘몸’이라 부른다. 이 몸을 넣고 끓인 국이라서 몸국이라 칭한다. 돼지고기와 내장, 순대까지 삶아 낸 국물에 모자반을 넣고 끓이면 느끼함이 줄어들고 독특한 맛이 우러난다.
혼례와 상례 등 제주의 집안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만들었던 행사 전용 음식이다. 행사용 음식이었던 만큼 한때 가정의례 간소화 정책에 따라 돼지 추렴 자체가 많이 사라지면서 거의 사라졌던 음식이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마을단위의 행사에서 다시 나타나면서 일반 식당들 가운데도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몸국은 생선이나 어패류 이외의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하기 힘들었던 제주 사람들이 귀한 돼지고기를 온 마을사람들이 알뜰하게 나눠먹었던‘특별식’이었다.
만드는 법도 쉽다.
돼지고기와 뼈는 물론이고 내장과 수애(순대)까지 삶아낸 국물을 버리지 않고 육수로 사용한다. 그리고 겨울에 채취해서 말려놨던 모자반을 찬물에 불려서 염분이 제거되도록 잘 빤다.
모자반의 염분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으면 국물에 쓴맛이 난다. 염분을 제거한 모자반을 촘촘히 칼질한 뒤 준비한 육수에 넣고 끓여서 만든다.
몸국을 끓일 때는 내장 일부와 ‘미역귀’라고 부르는 돼지의 한 부위인 장간막을 잘게 썰어 넣어야 제 맛이 난다. 신 김치를 잘게 썰어 넣어 간을 맞추기도 하며 국물이 너무 맑은 경우 메밀가루를 풀어 넣어 약간 걸쭉한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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