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遷位 기행 .44] 난은 이동표(1644∼1700년)

  • 김봉규
  • |
  • 입력 2012-02-22   |  발행일 2012-02-22 제20면   |  수정 2012-02-22
글씨 : 土民 전진원
불의와 타협않은 일생…‘작은 퇴계’로 불리다
이조전랑 재직땐 정승 외압에도 굴하지 않아
숙종시대 인현왕후 폐위때도 거침없는 직언
과거 앞두고 자기 이름 회자되자 응시 접어
부임한 곳마다 선정 펼쳐 백성들로부터 칭송
20120222
부인과 합장돼 있는 난은 묘소(봉화군 법전면 어지리). 터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석물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위는 난은 모친 묘소다.

난은(懶隱) 이동표(1644~1700)가 1691년 겨울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면서 이조좌랑과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를 겸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이조전랑에 승진, 관리를 등용하고 물리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외압에 휩쓸리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당시 전랑장(銓郞長)인 이조판서가 권세가 자제인 류재와 이수인 두 사람을 청선(淸選: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 홍문관 등의 벼슬인 청환(淸宦)의 후보자)에 넣으려 하자 난은은 마땅하지 않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류재는 문망(文望)이 없고 이수인은 중궁손위(中宮遜位: 인현왕후 폐위) 때 성균관 유소(儒疏)의 소수(疏首)가 되었음에도 회피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집권자 민암의 아들 민장도(閔章道)의 청선록을 통과시키려 하자, 민장도는 옳지 않은 행위로 사류(士類)가 천시하는 인물이므로 지금의 정승 아들이라고 해서 쓸 수는 없다며 청선록에서 빼버렸다. 동료들이 놀라며 말렸으나 난은은 “이 사람들 모두 물의가 있는데 권세와 가문의 힘이 있다고 해서 어찌 함부로 넣겠는가”라며 거절했다.

이조판서도 성이 났으나 어찌할 수 없자, 사람을 보내 난은에게 타이르기를 민장도의 등용을 통과시켜준다면 자신도 난은이 하는 청을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은은 탄식하며 “전랑장은 공평을 다루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사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려드니 함께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그날로 사표를 낸 뒤 서울을 떠났다.

그 때(1692년 6월)가 조정의 중대한 모임이 임박한 시기인데다 비가 많이 내리는 데도 도롱이를 갖추고 배에 오르니, 조정 동료들이 전송 나와 서로 돌아보면서 ‘오늘날의 소퇴계’라 하였다.


◆“원수는 갚을지 몰라도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1692년 6월 이후 1693년 봄에 이르기까지 헌납(獻納), 교리(校理), 사인(舍人: 의정부 관직), 집의(執義: 사헌부 관직) 등 여러 직첩이 13 차례나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2월 다시 집의가 제수되자 임금의 특별한 대우와 명을 거역하기가 어려워 부득이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 조정이나 민간 모두가 기뻐했다. 그리고 당시 거리의 아이들 사이에는 서로 다투거나 할 때 “네가 이사인(李舍人)과 같은 덕망이 있느냐”는 말을 하게 되면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사간이 되어 시정을 논한 논시정소(論時政疏)에서 “사대부의 출처거취가 올바르지 못해 승진을 다투어 관기(官紀)가 극도로 혼탁함에도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이 바로잡지 못함은 직책을 다했다고 할 수 없고, 전하가 간신(諫臣)을 대하는 도리 또한 다하지 못해 10대간(臺諫)이 굳이 다투어도 1대신(大臣)의 말 한마디로 제지되어, 잘난 듯이 남의 뜻을 꺾으면서 가슴을 헤쳐 받아들이는 아량이라고는 없으니 오늘날 언로가 막힌 것이 어찌 제신(諸臣)들만 탓하겠습니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정의(情意)가 통하지 못해 독촉과 견책이 따르게 되니, 신하는 임금의 뜻에 어긋날까 두려워 아유구용(阿諛苟容: 아첨하는 일)을 일삼아서 이른바 ‘황공대죄(惶恐待罪) 승정원(承政院)이요, 상교지당(上敎至當) 비변사(備邊司)’라는 옛말이 불행히도 오늘의 현상”이라고 비판하고, 백관의 임용과 파면에 대해서도 “등용할 때는 마치 무릎에라도 올려 놓을 듯이 하다가 쫓아낼 때는 마치 깊은 못에라도 떨어뜨릴 듯하여 환국이 있을 때마다 형벌과 살육이 자행되니 어찌 국맥이 병들지 않으며 인심이 동요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제신을 위해 은혜와 원수를 쾌히 갚았다고 하겠으나 나라의 위망(危亡)이 따라올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 사(私)를 억누르시고 이목(耳目)을 밝히신다면 귀위(貴威)들이 입을 열지 못할 것이요, 저희들 청의(淸議)를 가진 신하들이 임금을 더 의지할 것입니다”라며 실정을 직간했다.

◆최우선 순위로 한림(翰林) 적격자에 추천돼

숙종시대 인물을 평하는데 있어서 난은 이동표에 대해서는 모두가 명신이라는데 입을 모았다. ‘기사년의 변’(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봉한 일)을 당했을 때 소를 올려 바른 말을 했고, 또한 권귀(權貴)의 무리를 배척해 혼탁한 조정의 분위기를 맑게 하고자 누구보다 앞장서 노력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는 당대의 으뜸’이라는 평을 들었던 난은은 1644년 예천에서 태어났다. 14~15세 때 경서와 사기에 정통했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더니 항상 말하기를 “장부로 태어나서 마땅히 성현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난은은 명리에 뜻이 없어 30세가 넘도록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나, 아우가 병사하고 여동생 또한 요절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32세에 과거(東堂試)에 응시했다. 당시 시관(試官)이 난은의 명성을 듣고 “이번 과장에는 이모가 반드시 장원을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난은이 이 소문을 듣고는 웃더니 시험 당일 아침에 머리를 고의로 1천번을 빚으면서 시작 시간을 넘김으로써 응시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이천소(李千梳)’라는 병칭을 얻게 되었다.

1675년 모친의 명에 따라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7년 증광과에 수위(首位)로 합격했으나 파방(罷榜: 합격자 발표 취소)으로 실패하고, 1683년에 비로소 문과에 급제했다. 권지성균관학유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689년 한림(翰林) 적격자를 추천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난은이 영위(領位)로 추천되었고, 당시 수상 권대운은 “임금의 말씀이 이동표는 문학과 조행(操行)이 당세에 짝할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옥당에 둘 일이지만 요직에 임용하기가 바쁘니 순서를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셨다”라고 말했다. 난은은 특명으로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이틀만에 다시 홍문관 부수찬에 발탁됐다. 난은이 부임하지 않고 사양하자 다시 사간원헌납에 임명했다.

◆지극한 효심, 모친상 후 시묘살이하다 별세

얼마 후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그 잘못을 극간하면서 직언한 신하들에게 특전을 내려줄 것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궐내에 들여보냈다.

당시 임금은 신하들의 반발에 크게 진노하며 모두 엄한 형벌로 다스림은 물론, 다시 항소(抗疏)하는 사람은 역률(逆律)로 논하겠다고 했다. 이 때 난은은 죽음을 무릅쓰고 극간하려고 마음먹으면서도 모친에게 근심을 끼칠까 염려되어 그 뜻을 모친에게 이야기하니 모친도 허락해 상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경직(硬直)하여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그 일로 인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충(忠)에 보탬이 되지 않고 효(孝)에도 어긋날 뿐이라며, ‘옥산의 새 무덤(장희빈 부친 묘소)에는 양마석(羊馬石)이 솟아있고(玉山新阡羊馬嵯峨)/여양의 옛집(인현왕후 친정집)에는 근심과 걱정에 싸여 있다(驪陽舊宅氣像愁慘)’ 등의 문구를 삭제했다. 그러나 난은은 원래 내용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 후 양사와 옥당이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閔鼎重)의 안률(按律: 죄를 조사해 다스림)을 합계(合啓)할 것을 청하니, 난은은 낯빛을 붉히며 반박하기를 “그대들이 중궁께서 손위되실 때 목숨을 걸고 다투지 못하며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놓고, 지금 또 이 사람의 죄를 논하려 하느냐. 그렇게 되면 성모(聖母)에게도 화가 미칠 터이니 그것을 어찌할 것이냐”라고 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난은에게 붓과 벼루를 내밀며 억지로 계초(啓草)를 쓰게 하자 목청을 돋우어 “내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으면서 어찌 남을 위해 대필하는 일을 하겠는가” 하고는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광주목사를 거쳐 1696년 53세에 삼척도호부사로 부임해서는, 어사가 최고의 치적을 쌓은 것으로 상주(上奏)할 정도로 선정을 펼친 뒤 1698년에 귀향했다.

그 해에 모친상을 당했다. 홀로 남은 모친의 상을 당한 후 슬퍼함이 지나쳐 몸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난은이 지나치게 집상(執喪)할 것을 염려해 모친이 병중에 유계(遺戒)를 써두었는데, 집안 사람이 그것을 보여주며 슬픔을 자제할 것으로 권했으나 그것을 읽어보며 더욱 통곡하기도 했다. 지나친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 삼년상을 다 치르지도 못하고, 결국 모친 묘소 앞 여막에서 1700년 7월에 별세하였다.

정조 9년(1785) 영남의 선비들이 난은의 덕을 진술해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했고, 태상관(太常官)들의 의견에 따라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청렴강직하고 대의에 따라 출처를 분명히 했던 난은은 “남자는 모름지기 천 길의 절벽에 선 듯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며 항상 스스로를 경계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 이동표 약력
△1644년 예천 출생 △1675년 생원시 합격 △1683년 문과 급제, 성균관 학유 △1691년 이조좌랑 △1693년 노모 봉양 위해 전라도관찰사 사양하고 광주목사 자원 △1696년 삼척도호부사 △1698년 춘양 은거 △1700년 모친 집상(執喪) 중 여막에서 별세 △1741년 이조판서 추증 △1785년 시호 충간(忠簡: 危身奉上曰忠 正直無邪曰簡)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