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장수 3절(三節)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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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5-17   |  발행일 2013-05-17 제38면   |  수정 2013-05-17
큰 바위 속에 한 마리 말이 추락하고, 꿩은 놀라…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장수 3절(三節)
타루공원 절벽에 조각되어 있는 떨어지는 말과 달아나는 꿩.

장수는 산과 물의 고장이다. 군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산악 지형이고, 금강과 섬진강의 물줄기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장수, 이름도 긴 물이다. 장수의 한가운데를 길게 흐르는 금강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 고장의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들을 만난다. 순의리 백씨, 향교지기 정경손, 그리고 의암 논개가 그들이다. 장수 사람들은 이들을 ‘3절(節)’이라 칭송한다.


◆ 목숨으로 책임을 진 아전 백씨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장수 3절(三節)
타루각 안에 타루비와 장수리순의비가 나란히 서있다. 지방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큰 바위 속에, 한 마리의 말이 추락하고 있다. 꿩이 달아난다. 사람은 뵈지 않고, 바위 아래 물은 잔잔하다. 만들어진 세트지만 바위만은 오롯한 것일 게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바위 옆 비각 안에 모셔진 두 기의 비석이 전한다.

조선 숙종 4년(1678),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은 아전과 함께 전주감영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천천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고 있을 때, 길가 숲 속에 있던 꿩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날아오른다. 푸다닥 요란한 꿩의 날갯짓에 조 현감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절벽 아래의 소에 추락하고 만다. 조 현감은 말과 함께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다.

현감을 모시고 가던 아전은 자신의 잘못이라 통곡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바위에 꿩과 말을 그리고 타루(墮淚) 두 자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현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 자신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1802년 장수현감 최수형이 아전의 충성스러운 마음에 감복해 ‘타루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1881년, ‘장수리순의비(長水吏殉義碑)’가 지역 사람들에 의해 타루비와 나란히 세워진다. 두 개의 비는 타루각 안에 모셔져 있다. 지금 바위 앞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절벽 바로 아래로 시내가 흘렀다고 한다. 그림과 타루 글자는 1967년 도로개설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 목숨으로 책임을 진 아전에 대해서는 다만 백씨라고 전해진다.


◆ 왜장을 안고 강물로 뛰어든 여인 논개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장수 3절(三節)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 장수에서 태어난 논개의 충절은 이 지역 사람들의 자랑이다.

장수 읍내로 들어서면,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정자 하나가 서있다. 의암루다. 그 아래쪽으로 너른 의암저수지(두산제)가 청명하게 열려 있다. 산책로와 휴식 공간이 잘 조성되어 있는 저수지다. 물의 동쪽에는 산인지 숲인지 나지막한 푸르름이 병풍처럼 시립하였는데, 그 기슭의 도타운 땅 위에 사당이 들어서 있다. 의암사, 논개의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했던 여인 논개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구전되어 오는 것들이다.

그녀는 흔히 진주목의 관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도 그러한 신분을 천하게 여긴 보수적인 사대부들 때문이었다. 그녀를 기억하고 인정하고 존경해 온 것은 민중들이었다. 특히 진주 사람들.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결국 200년이 훨씬 지난 1721년 경종 때 그녀는 ‘의기 논개’라는 공식적인 호칭을 가지게 된다. 이후 영조 때는 그녀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가 진주의 의암 부근에 세워지게 되었다.

장수 사람들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논개는 1574년 9월3일 장수의 주촌마을에서 갑성년, 갑성월, 갑성일, 갑성시라는 특이한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원래 양반가의 딸로 집안이 몰락하여 풍파를 겪다가 17세 때 담양부사인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는데, 그녀의 순절이 전사한 남편을 위한 복수였다는 말도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장수 3절(三節)
의암송. 장수현감 최경회와 논개가 함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장수에는 논개의 유적이 많다. 그녀가 태어났다는 마을은 수몰되어 사라졌지만 그 인근에 주촌민속마을이 조성되어 있고 생가도 복원되어 있다. 의암사 북쪽에는 기념관이, 그 앞에는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가 서 있다. 장수군청 앞에는 400년 전 최경회와 논개가 함께 심었다는 의암송이 아직 자라고 있다. 그녀의 무덤은 함양에 있다는데 확증된 것은 아니다. 그녀에 대한 대부분이 추정과 유력설로 전해지지만 다만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장을 안고 강물로 뛰어든 여인 논개를, 우리는 안다.


◆ 왜장을 감복시킨 향교지기 정경손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장수 3절(三節)
5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장수 향교. 대성전은 국보였다가 1962년 보물 제272호로 재지정되었다.

장수군청 옆에 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옆에 장수 향교가 있다. 가방을 맨 어린아이들이 향교 앞을 졸망졸망 지나간다. 옛 교육기관과 현대의 학교가 나란히 자리해 보기에 즐겁다. 장수향교는 1686년에 완공된 것이다. 5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향교란 드물다. 조선 초기 향교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장수향교는 그래서 보물이다. 향교 안에는 대성전을 비롯해 명륜당, 사마재, 진덕재, 경성재, 부강문 등이 있다.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지나는 모든 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왜군은 장수 향교 앞에서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목을 먼저 베고 들어가라.”

왜적의 앞을 막고 소리친 이는 향교지기 정경손이었다. 그의 당당한 기개에 감복한 왜장은 ‘이 성전을 침범하지 말라’는 쪽지를 대문에 붙이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 후 왜적들은 향교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향교의 외삼문인 부강문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정충복비(丁忠僕碑)’다. 헌종 때인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그를 기려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를 지금 바라보고 둘러볼 수 있는 것은 왜장을 감복시킨 향교지기 정경손의 덕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88올림픽고속도로 남장수IC로 들어간다. 거창으로 들어가 육십령을 넘어 가도 된다. 장수읍에 논개 사당과 장수 향교가 근거리에 위치하고 군청도 향교 옆에 있다. 읍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조금 북향하면 타루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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