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17] 목민관 이채와 지례면 이공제

  • 박현주 임훈 박관영
  • |
  • 입력 2013-07-30   |  발행일 2013-07-30 제13면   |  수정 2013-08-06
“들어올 땐 안타까워 울고, 나갈 땐 쌓은 정이 아쉬워 우노라”
20130730
1793년 방천제방을 세운 지례현감 이채의 흔적은 김천시 지례면 곳곳에 남아있다. 현재의 방천제방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지만, 돌로 만든 옛 방천제방의 기반은 아직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김천시 지례면의 감천 기슭에는 지례현감 이채(李采, 1745~1820)가 축조한 제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제방은 백성의 안녕을 위한 목민관의 노력이 깃든 곳으로, ‘물을 막는다’는 의미의 ‘방천(防川)제방’으로 불린다. 또한 물길을 다스린 이채의 공을 기린다는 뜻에서 ‘이공제(李公堤)’로도 불린다. ‘감천 150리를 가다’ 17편은 굳건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백성을 사랑한 조선의 관료 이채에 관한 이야기다.


#1.목민관 이채, 지례현과 인연을 맺다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와 교리에 위치한 방천제방의 시작은 18세기로 거슬러올라간다. 1790년(정조 14), 당시 조선은 엄청난 홍수피해를 입어 백성들의 피폐한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전국의 마을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길은 끊어지고 농경지는 송두리째 사라져 끼니를 걱정할 처지였다. 가축들은 진흙더미에 깔려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넋 나간 탄식과 한숨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힘없는 민초들이 감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천을 품은 지례현도 마찬가지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감천의 지리적 특성상 갑작스러운 급류가 형성됐고, 현재의 지례면 일대에는 엄청난 홍수피해가 발생했다.

조선의 전 국토가 몸살을 앓았던 이 시기, 지례현감의 직을 제수받은 이채는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지례현으로 향했다. 일개 지방 수령의 자리였지만 이채에게 있어 현감의 소임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채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이제(李濟, 1654~1724)의 손자였다. 이채가 태어나기 21년 전, 정쟁에 휘말린 그의 할아버지는 귀양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늘 명문가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했던 이채에게 벼슬의 높고 낮음은 문제되지 않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모든 공무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이채의 지례현감 부임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전 국토가 수해로 황폐화된 탓에 제대로 길을 헤쳐올 수 없었다. 평소 한양에서 지례현까지의 여정은 7일이면 충분했지만, 15일이나 걸린 끝에 가까스로 지례현에 다다랐다.


#2.눈물로 완성된 제방

1790년 12월, 이채와 그의 일행이 지례현에 들어서자 기가 막힌 풍경이 펼쳐졌다. 수해로 농경지가 떠내려간 것은 물론, 헐벗은 백성들에겐 무엇 하나 온전히 남은 것이 없었다. 이채는 이 광경을 보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런 곳에 내가 다스릴 백성들이 살고 있구나. 이 안타까운 백성들의 사정을 어찌 돌보아야 할꼬….”

하지만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것을 제외하고 지례현의 풍광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채는 “바위에 물이 고여 있는데 거울과 같다.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인가”라며 착잡한 마음을 달랜다.

지례현에 도착한 이채는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지례현 시찰에 나섰다. 이채는 곧 감천 주변에 제방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채가 바라본 당시의 감천은 범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자연적으로 퇴적된 토사가 하천 주변으로 언덕을 만들었지만,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하기에는 무리였다. 이채는 백성의 안녕을 위해 감천에 제방을 쌓기로 결심한다.

제방을 쌓기 시작한 이채는 부임 2년 만에 지례현읍 중심을 감싸는 1㎞의 제방을 쌓는 데 성공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언덕을 중심으로 둑을 쌓아 홍수 예방효과가 탁월했다. 제방을 완공한 이채는 그 공을 인정받아 지례현감 부임 2년 반 만에 선산부사로 영전됐다.

1793년 6월, 선산부사로 떠나는 이채를 보기 위해 1만여명의 지례현 백성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동구 밖까지 떠나가는 현감 이채를 따르며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지례현 백성들이 손을 흔들며 환송하자, 현감 이채도 백성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남긴다. “내가 들어오면서는 서글퍼서 울고, 내가 나가면서는 백성들과 쌓은 정이 너무 아쉬워 울면서 가노라.”

이후 백성들은 지례의 방천제방을 ‘이공제’라 부르기 시작한다. 이채는 선산부사를 포함해 여섯 번의 부사직을 수행했으며, 이후 중앙관료로 발탁된다.


#3.‘세뚝’을 아시나요

20130730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와 교리 사이에는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쌓아 올린 사이둑(세뚝)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방천제방이 무너졌지만, 사이둑 덕택에 교리 일대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방천제방은 특이한 축조방식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흙을 다져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연석을 이용한 경치돌(축대를 쌓을 때 쓰는 석재)로 기초를 쌓은 덕분이다. 삐죽삐죽하면서도 불규칙한 모양의 경치돌을 이용했지만, 오밀조밀하게 돌을 짜 넣어 견고함을 더했다.

이채가 만든 방천제방에는 또다른 홍수 예방장치가 있다. 방천제방 뒤편 지례장터와 관아를 중심으로 ‘사이둑’, 일명 ‘세뚝’을 쌓아올렸는데, 이는 수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2중의 안전장치였다.

방천제방과 함께 사이둑까지 들어선 지례현은 어떤 고을보다 안전했다. 방천제방이 1차 범람을 하더라도 사이둑 덕택에 관청과 마을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천제방에 당시의 최신기술이 적용됐다는 설도 있다. 방천제방이 완공된 1793년은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가 수원 화성의 축조를 명하기 1년 전이다. 당시 수원 화성의 축조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설계한 거중기 등 최신기술이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고급 기술이 방천제방 축조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당시 홍수로 인해 제방 축조비용을 조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 부역인원을 줄이지 않았다면 제방의 완공은 힘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천제방 축조는 지례현민 사이에서 널리 불린 농민요 ‘축 다지기 노래’가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일명 ‘장천다지기 노래’로도 불리는 이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이들은 이미 세상을 등졌지만, 이와 관련한 스토리는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일제강점기 김천 사람 상당수가 함경도의 산판에 뛰어들었는데, 함경도 일대에서 김천 지례의 축 다지기 노래가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4.이공제의 고마움을 되새기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방천제방은 이채가 만든 제방이 아니다. 방천제방은 축조 이후 100여년 동안 지례주민들을 보호했으나, 1936년 병자년 수해가 닥치자 물에 떠내려가고 만다.

당시 병자년 수해의 피해규모는 엄청났다. 감천유역의 범람으로 김천에서만 53명이 사망하는 등 경북도내에서만 541명이 숨졌다. 이때 400만㎡가 넘는 김천 일대의 경작지도 유실됐다. 김천시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광복 후 발생한 사라호 태풍보다 더 큰 재난이었던 것이다.

이후 방천제방은 일제에 의해 다시 축조됐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채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1937년 무너진 제방 위에 다시 뚝을 쌓았는데, 제방의 폭이 넓은 구간의 경우 옛 제방의 구조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또한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사이둑(세뚝)의 흔적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하지만 방천제방을 만든 주인공이자 지례현감이었던 이채의 공을 기린 기념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70년대까지 지례장터 인근 삼선생유허비 옆에 이채의 공덕비가 있었는데, 1970년대 신작로 공사 중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공덕비에는 “우리는 이 방천제방을 이공제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한편 2002년 태풍 루사가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방천제방의 일부가 무너지자 지례면 일대는 또다시 수해를 입는다. 이는 지례면 사람들에게 방천제방의 중요성을 한 번 더 일깨워 준 사건으로, 이채의 존재와 그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준 일이었다. 당시 2만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지례면과 김천 일대의 수해복구에 동참했는데, 지례면 사람들은 방천제방에 기념비를 세워 자원봉사자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비에는 ‘그대들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참고 문헌: 김천시사
공동기획 : 김천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