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축조된 ‘대불지’에서 불상·가시연꽃·토막시신·기형물고기 발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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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25   |  발행일 2013-10-25 제34면   |  수정 2013-10-25
현재 영선시장 자리가 옛 영선못

대구와 인접한 경산은 못이 많기로 유명하다. 전국 시·군 중 못을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다. 문천지와 남매지, 반곡지, 상신지 등 100곳이 훨씬 넘는다. 경산과 연결된 대구 역시 많은 못과 저수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사라지거나 매립됐지만,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오는 못과 저수지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현재 도심외곽의 단산지와 옥연지, 운암지 등을 제외하고 그나마 호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못은 수성못과 성당못뿐이다.

농경시대 못과 저수지는 홍수조절은 물론, 가뭄 때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못은 생태계의 보고이며, 수변경관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세계최초의 수리시설인 중국 쓰촨성의 두장옌(都江堰)과 삼한시대 때부터 있던 상주 공갈못과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못은 여름에 더위를 식혀주고 겨울에 건조한 날씨를 막아준다. 아름다운 정원에는 늘 멋진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명산에는 깊은 골과 울창한 수림,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데다 맑은 계곡물과 소(沼·Pool)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는 대개 1~2개의 호반을 끼고 있다.

못과 저수지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산업화·도시화 때문이지만, 편의성과 효율성만 앞세운 난개발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못을 메우는 대신 인공폭포와 인공 풀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호반이 있는 도시는 왠지 정감이 더 간다. 만약 수성못과 성당못이 없다면 대구는 얼마나 삭막할까. 그 많던 대구의 못과 저수지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대구의 대표적인 못과 저수지를 찾아 과거여행을 떠나보자.

현재 영선시장 자리가 옛 영선못
1924년 동아일보 “대구의 명승지”

현 서문시장 자리는 원래 ‘남소’
일제가 비산고분군 봉토로 메워


수백년 역사의 감삼못 사고 빈번
미군헬기, 익사 위기 어린이 구조


수성구청·경찰서 자리엔 ‘범어못’
늑대·여우 자주 출몰 사람 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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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사라진 못. <1918년 대구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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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홍수로 범람위기에 처한 대불지. <동아일보>

◆대불지

1958년 7월 초 대구에 일주일간 장맛비가 내렸다. 북편 금호강둑 200여m가 붕괴돼 강물이 검단들과 산격들 일대로 밀려왔다. 가옥 40여채가 침수되고 수백 정보의 논과 밭이 유실됐다. 복현동에 있던 대불지도 범람위기에 처했다.

74년 대불지에서 희귀연꽃인 가시연꽃이 발견되고, 75년에는 토막살해된 시신이 떠올라 전국적인 뉴스가 됐다.

대불지(大佛池)는 ‘배자못’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못 주변에 ‘배씨’와 ‘채씨’가 많이 거주해 ‘배채못’이 ‘배자못’으로 변했다는 설, 저수지를 축조하다 큰 불상이 발견돼 ‘대불지’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대불지 이전에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전영권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16세기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8세기 대구읍지에는 대불지가 ‘불상지(佛上池)’로 나온다”면서 “고려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못”이라고 했다. ‘대불지’라는 명칭은 1918년 일제가 제작한 대구지형도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38년 5월 못이 확장됐다. 못의 규모는 약 12만2천여㎡였으며, 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했다.

대불지 인근 문성초등을 졸업한 서충교씨는 “60년대만 해도 식용이 가능한 말을 채취할 만큼 물이 깨끗했고 버들붕어와 가물치, 송사리, 붕어 등 물고기도 많았다. 여름에는 못에서 멱을 감고, 못 둑은 낚시꾼으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사진가 김일창씨는 “70년대 경북대 지리학과 학생들이 배자못에서 측량실습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75년 검단공단이 생기고,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면서부터 생활오수와 공장폐수로 물은 급격히 오염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기형물고기도 발견됐다. 결국 94년 대불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복현화성·복현보성·복현서한·대백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서씨는 “배자못을 다 매립하지 않고 일부라도 살려뒀다면 대불공원, 대구엑스코와 더불어 북구의 명물이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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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동아일보는 달성공원과 함께 영선지(靈仙池)를 대구의 대표적 명승지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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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영남체육회가 주최한 빙상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영선못 빙판을 질주하고 있다. <동아일보>

◆영선못

프랑스의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으젠느 앗제는 1890년부터 30여년간 파리의 풍경과 모습 수천점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구사단(寫團)의 개척자 최계복도 1930년대부터 대구를 비롯해 백두산, 울릉도 등지의 풍경을 촬영했다. 그중 한 장이 1933년에 발표한 ‘령선못의 봄’이란 흑백사진이다. 이 사진은 수양버들에 초점을 맞추고 놀이배에 탄 상춘객을 아웃포커스해 영선못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2000년 발간한 대구시사에는 영선못이 조선 말기에 축조한 못이라고 나온다. 1918년 대구지형도에는 영선못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선못(약 2만평)이라 추정되는 저수지 북편에 수도배수지(수도산)가 위치하고, 바로 서쪽에 신지(新池·새못)가 있다. 영선지(靈仙池)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건 동아일보에서다.

1924년 동아일보는 달성공원과 함께 영선지(靈仙池)를 대구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소개했다. 못 둑엔 막걸리와 비빔밥을 파는 주막이 있었고, 참나무와 벚꽃이 무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선지는 24년 여름에 범람했고, 수해가 발생했다. 29년 서편 새못과 함께 영선지 제방이 붕괴돼 물난리가 나는 등 변고를 겪었다.

1926년에는 영선지를 일명 ‘연신지(蓮信池)’ ‘영선지(營繕池)’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 보병80연대 연병장이 지형도에 나타난 것으로 봐 ‘영선(靈仙)’이 군사주둔지와 관련해 ‘영선(營繕)’으로 불린 듯하다. 현재 이 병영터에는 미군부대 캠프조지가 자리 잡고 있다.

영선지 남쪽에는 일제가 만든 ‘주레이또’, 즉 충렵탑(忠靈塔)이 높이 서 있었다. 충령탑은 66년 철거됐다. 영선못에는 빙상경기도 자주 열렸다. 대구의 원로화가인 이경희 화백은 영선못에서 열린 빙상대회에 출전했다. 광복 후 대부분 매립돼 시민운동장으로 사용했다.

향교 인근에 살았던 원로사진가 김일창은 “영선못에서 얼음을 지치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사진으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고 회고했다.

영선못은 70년쯤 완전 매립돼 현재의 영선시장이 됐다. 영선시장 입구에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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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제작된 대구지도에 남소, 즉 천왕당지(빨간 점선)가 나 와 있다.


◆남소

남소(南沼)는 서거정의 대구십경 중 제5경 ‘남소하화(南沼荷花)’에 처음 등장한다. 서거정은 달성서씨로 달성토성이 세거지였다. 남소는 ‘달성토성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해서 ‘남지(南池)’라고도 불렸다. 1750년대초 제작한 해동지도와 연대미상의 여지도에는 ‘남소’로, 지승(地乘) 경상도편에는 ‘남지’로 나온다. 경주도회(좌통지도)와 1903년 제작된 대구시가지도에는 이름 없이 나오다 1905년과 1915년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 ‘천왕당지(天王堂池)’로 바뀌어 등장한다. 천왕당지의 위치는 남소와 일치한다.

1918년에 제작한 대구지형도에는 천왕당지란 이름이 없지만 같은 위치에 못이 있다. 일각에서 남소가 ‘성당지’ 또는 ‘영선지’라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성당지는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고 당시 수성현에 속했으며, 영선지는 당시에 축조되지 않았다. 일제는 1920년대 초 내당동과 비산동 고지대에 있던 고분군의 봉토와 현 대성초등학교 언덕의 흙으로 남소를 메웠다. 그리고 지금의 중구 동산동 대구3·8만세운동발원지 표석이 있는 옛 서문시장(큰장)을 현 서문시장 위치(남소)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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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촬영한 감삼지 항공사진. 오른쪽에 두류네거리(7호광장)가 보인다.

◆감삼못

감삼못은 대구지역의 못 가운데 대불지, 성당지와 함께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큰 못이었다. 못과 관련한 사건사고도 많았다. 61년 감삼못에서 낚시를 하던 2명의 대학생이 익사했으며, 80년 1월에는 미군헬기가 감삼못에서 얼음을 지치다 빠진 한 어린이를 구조했다.

감삼못은 ‘감생이못’이라 불리기도 했다. 감삼못 뒤편에 감나무가 많아서 감삼이 됐다는 설, 원님이 지나다 백성이 준 감 3개를 먹은 후 감삼으로 했다는 설, 못 주변에 홍씨(洪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아 홍시(감)가 됐다는 설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감삼못의 수원은 대구문화예술회관 뒤 금봉산과 두류산이다. 이 물은 감삼동, 죽전동, 용산동 등 성서와 월배지역 농토의 ‘단물(甘水)’이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에는 ‘감삼제(甘三堤), 즉 감삼지가 서하하(西下下)에 위치하며 둘레가 6천410척(약 2㎞), 수심이 9척(2.7m)’이라고 나와 있다.

1918년 대구지형도에는 ‘감삼지’가 보인다. 감삼지 주변은 습지와 모래흙으로 덮여있고, 침엽수가 자생하고 있다. 73년에 달성고가 들어서면서 못 동편이 매립됐으며, 84년 3월 청구주택이 감삼못을 메워 광장타운1·2차아파트단지를 조성하면서 못은 안타깝게도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날뫼못

날뫼는 지금의 서구 비산1동이다. 날뫼못은 비산1동에 있던 못으로 원대지하도 일대였다. 규모는 약 3천300㎡, 수심은 3m가 넘었다고 한다. 경부선철도가 생기기 전만 해도 못은 하나였으나 기찻길을 경계로 2개로 나눠졌다. 짐을 싣고 가던 조랑말의 발굽이 철로에 끼여 사고가 나는 등 지하도가 없어 인마사고가 많이 발생했으며, 저수지 익사사고도 잦았다. 날뫼못은 현재 복개된 달서천과 바로 인접해 있었고, 주변은 대부분 논과 밭이었다.

원로사진가 장원식씨(83)는 날뫼못의 산증인이다. 비산1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0년대 그의 할머니 장례식 날 촬영한 사진에 날뫼못의 풍경이 오롯이 남아있다. 미제트럭과 승용차가 보이고 운구행렬이 못 둑으로 지나가는 모습이다. 뒤로는 당산과 비산천주교회(날뫼성당)가 흐릿하게나마 나온다.

그는 “날뫼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기억, 낚시로 잉어와 메기를 잡던 추억이 아직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시절에는 대구상고(현 상원고) 대표로 성당못에서 열린 빙상경기에도 참가할 정도로 스케이트광이었다. 연습은 주로 날뫼못에서 했다. 그는 “지금이야 수성구가 부촌이라지만 40~50년대는 서구에 부호가 많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1918년 대구지형도에는 2개의 날뫼못이 표시돼 있다. 날뫼못은 농토에 주택과 공장이 들어서면서 오염돼 못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70년대 매립됐다.

◆범어못

범어못은 1918년 대구지형도에 나온다. 못이 그 이전에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범어못은 현재 수성구청과 수성경찰서 일대다. 북쪽에 범어산(현 범어공원)이 있어 이곳에서 흘러내린 물길을 막아 저수지를 축조했다. 규모는 옛 감삼지의 절반 정도다.

현재 범어네거리를 기준으로 서북쪽 법원 맞은편 일대 범어동은 골이었다. 지금 신천과 맞닿은 범어천의 물길과 일치한다. 이곳은 야시골로 불렸다. 여우가 자주 출몰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범어배수지 동편 대동교회 뒤쪽도 골짜기였다. 밤밭이 많아 밤골로 불렸다. 어린이대공원 부근에서 태어난 원로사진가 구자춘씨(80)는 범어못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현재 달구벌대로는 10차로이지만 40년대는 버스 두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자갈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동쪽으로 담티를 지나 경산으로 이어졌지요. 인근엔 민가도 많지 않았습니다. 몇 백 호도 안 됐어요. 범어못 인근에 늑대와 여우가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기도 해 밤에는 다니지 못했습니다. 집에 돼지를 키웠는데 늑대가 돼지새끼를 물어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범어못은 수성못의 4분의 1 정도 됐을까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여름에 멱도 감았고, 아이들과 함께 썰매를 타기도 했지요.”

범어못은 70년대 중반에 매립됐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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