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와 호텔수성 회장으로 성공신화 쓰고 있는 김재석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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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27   |  발행일 2014-06-27 제37면   |  수정 2015-01-30
“돈 벌겠다고 일을 하면 비참해져…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다보면 돈은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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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 경일대 석좌교수 겸 호텔수성 회장이 호텔수성 레스토랑 발코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호텔수성을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수성관광호텔(현 호텔수성)은 대구 최초의 관광호텔이다. 이 호텔 202호의 하루 숙박비는 319만원으로 대구에서 가장 비싸다. 202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용객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구의 청와대’라고도 불렸다. 수성못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이 방의 창문은 방탄철갑으로 돼 있다. 한국에선 유일하다. 그런데 이 수성관광호텔이 2년 전 한 교수에 의해 인수됐다.

김재석 경일대 건설공학부 석좌교수 겸 호텔수성 회장(54).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 수성관광호텔이 건립됐다. 김 교수는 궁벽한 산촌에서 태어난 자칭 ‘노가다’ 출신 교수다. 경일대 건설공학부 교수 재직 시 하양캠퍼스 건설을 진두지휘해 이전했다. 1993년 대구서 처음 통일시대를 대비해 남북도로와 철도를 구상했으며, 세종시 도로 교통입안, 경부고속철도 경주역사·김천역사를 현재의 자리에 유치했다. 또 대구도시철도경산연장 실무위원을 맡아 경산연장을 실현시켰다. 이뿐만 아니다. 교수출신 벤처 기업인으로 <주>경주천북기업도시를 유치해 성공을 거뒀다. 또 남부권신공항 전도사로 신공항 밀양유치에 혼신의 노력을 했다. 그는 2010년 감정가 100억원이 넘는 땅을 경일대에 기부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웃사랑도 남몰래 실천하고 있다. 2년 전 수성관광호텔을 인수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19일 그를 만났다. 그는 “아직 가야할 삶의 여정이 많이 남아있어 나의 삶을 드러내기가 부끄럽다. 하지만 희망의 삶을 포기하거나 방황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싶어 인터뷰에 응한다”고 했다.

-교수활동을 그만둔 건가. 수성관광호텔을 인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만둔 건 아니다. 경일대 석좌교수로 있는데, 22년째 석·박사과정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 현 호텔수성은 1960년 1월30일에 건립된 대구의 1호 관광호텔이다. 대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호텔의 산 역사로 유서가 깊다. 대구시민이라면 수성못에서의 추억 한편은 다 간직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경부고속도로와 새마을운동을 입안한 곳이다. 이곳에서 국무회의도 열었다고 한다.”

-호텔을 신축하거나 다른 호텔을 인수할 수도 있지 않았나.

“알다시피 수성못은 대구의 명소다. 92년 미국에서 도시 및 교통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수성못과 수성관광호텔에 가끔 들렀다. 그런데 명소가 점점 쇠락하는 것 같더라. 호텔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지역은 물론 우리나라의 명소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인수를 결심하게 됐다.”

-올 7월이면 인수한 지 2년째다. 교수와 CEO를 겸하고 있는데.

“실제 호텔의 경영은 아내(김영미 대표)가 하고 있다. 교수는 온실에서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만 CEO는 정글의 세계다. 도시 및 교통공학은 도시민의 삶뿐만 아니라 도시의 기반시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학문이다. 전공한 지식을 실무에 적용시켜 지역과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 10여 년간 교수생활을 하면서 벤처기업인으로 산업공단을 설립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CEO가 왜 정글의 세계인가.

“2004년 첫 교수 벤처기업인으로 <주>경일종합E&C(현 경주천북기업도시)를 설립하고 산업단지조성에 직접 나섰다. 개별공장의 난개발을 막고 여러 기업을 집단화해서 기업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지자체나 국가가 해내기도 버거운 일을 일개 교수가 나서서 했다. 2003년부터 부지매입을 시작해 2009년 경주시 천북면 오야리 230여만㎡ 부지에 사업비 1천500억원을 들인 산업단지가 완공단계에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100여개에 달하는 기업을 유치하기까지 지난 11년간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공사비가 없어 사채를 빌리고 수백억원의 부도위기를 맞기도 했다. 각종 민원과 투서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어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교수연봉으로 수백년 갚아도 못 갚을 부채 때문에 6장짜리 유서를 주머니 속에 수년간 지니고 다녔다. 불면의 날이 계속됐고 피눈물을 흘릴 만큼 참담했다. 하지만 끈질긴 집념으로 이겨냈다. 2006년 11월 사채와 이자를 다 갚고 다시 제1금융권의 지원으로 일어섰다.”

-산업단지에는 어떤 기업이 들어왔나.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기업과 영국의 징콕스 등 외국기업도 있다. 앞으로 최소한 30여개 기업을 더 유치할 계획이다. 130개에 달하는 기업이 자립자족, 상생·발전해 커다란 시너지효과를 분출할 때 30만 경주시민을 먹여 살리는 경제심장부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공장 입주가 다 이뤄지면 연간 총매출은 30조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된다. 1단지 99만1천736㎡(30만평) 준공에 이어 2·3단지 준공이 올해 말로 예정돼 있다. 어려움이 많지만 극복할 것이다.”

-천북산업단지 내 노른자 상업시설 부지를 경일대에 기증하기도 했는데.

“대학은 나를 키운 곳이자 현재 몸담고 있는 곳이다.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대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 교수 3년차 시절 현 경일대 하양캠퍼스건설을 진두지휘했다. 또 20년간 도시문제연구소장을 맡았다. 경일대에 애정이 많다.”

-‘신공항교수’라고 불릴 만큼 남부권 신공항 밀양유치 전도사였던 걸로 알고 있다.

“92년 미국 켄터키주립대학에서 ‘도시 및 교통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인 칸 박사는 공항 및 비행기 관련 세계최고의 석학이다. 개인소유 비행기도 2대나 있다. 그 비행기 안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나는 3년반 동안 전 세계 500여개의 공항을 연구했다. 전 세계 공항 관련 교수를 불러 세미나를 열고, 워크숍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93년부터 경일대에 재직하면서 지역 최초로 대학원에서 ‘공항계획 및 설계’ 과목을 개설했다. 학생을 가르치면서 지역 경제발전을 위한 인프라로 동남권신공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때만 해도 다들 신공항이 왜 필요한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정신이상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후 사비를 털어 세미나와 공청회 등을 열고 언론을 통해 신공항건립의 당위성을 전파해오고 있다.”

-남부권 신공항과 관련해 할 말이 많겠다. 아직도 밀양이 최선이라고 보나.

“변함없다. 학자의 양심을 걸고 말한다. 99년 영천시 금호읍 황정들과 덕성들에 동남권신공항 입지여부 타당성을 연구조사 했는데 사실 항공수요가 의문시됐다. 이후 통일시대를 대비해 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제1허브가 인천국제공항이라면 북한 함경남도 철산이 제2의 관문공항이 될 수 있다. 한강 이남에는 1시간 이내에 제2, 제3의 수도가 접근 가능해야 하는데 밀양이 최적지다. 밀양시 하남읍과 창원시 대산면의 6천600㎡(2천만평)나 되는 신공항 부지를 발견했을 때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한 것만큼 ‘약속의 땅’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후 수백 번이나 그 지역을 답사했다. 그곳에 신공항을 건설하는 게 나의 책무이고 사명이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약 10억원의 사비를 들여 현장답사보고서와 토론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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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수성 인수 동기는

‘대구의 청와대’ 얼굴 호텔
옛 명성 잃은 데 마음 아파
“대한민국 명소로 만들자”
매물로 나오자마자 결심

교수와 CEO

이미 10여년간 교수하면서
벤처기업인으로 産團 설립
교수는 온실에서의 생활
CEO는 치열한 ‘정글 세계’

‘밀양 신공항’ 전도사

“가덕도는 국가적 재앙”
사비 털어 현장 답사하고
세미나·공청회 등 열어
밀양 당위성 지속 전파

자수성가의 삶

경주 빈농 아들로 태어나
독학과 아르바이트 병행
3시간 이상 자본 적 없어
돈 벌려 석면공장 막일도


-지난 6·4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부산시장 후보가 중앙당의 뜻이라며 부산지역 국회의원을 몰고 가 가덕도 유치를 선전했는데.

“한마디로 가덕도에 공항이 유치된다면 국가재앙이다. 100조원 이상 투입하면 모르겠는데 결코 불가능하다. 그에 비해 밀양은 10조원 내외만 들이면 가능하다. 가덕도는 수심 16~35m되는 깊은 바다를 100m 이상 매립해야 한다. 가덕도 전체를 통으로 들어내야 가능하다. 일본이 간사이공항을 건설할 때 수심 18m되는 바다를 33m 높이로 매립했는데 현재 침하되고 있는 중이다. 연간보수비용이 5조~10조원이다. 간사이가 가덕도에 비해 조건이 훨씬 나은데도 그렇다. 선진국은 내해공항을 선호한다. 더욱이 가덕도는 한반도의 태풍길목이다. 말이 되나. 정책은 오로지 정책으로 가야하는데 정치 쪽으로 갔다. 이명박 정권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가 밀양 신공항유치를 현실화시키지 못한 거다. 가덕도보다 밀양이 1.6점 앞섰다. 1점이라도 더 나왔으면 밀어붙여야 하는 것 아닌가. 부산시장은 가덕도를 빌미로 3번째나 당선됐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다시 호텔수성 이야기로 돌아가자. 최근 호텔 앞에 컨벤션센터를 짓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수성관광호텔을 인수한 뒤 2년간 약 100억원을 투자했다. 인수 이전 회사가 직원들의 봉급도 못 주고 있었다. 별관은 무너질 지경이었다. 수성호텔이 최고로 번성할 때도 무궁화 4개였는데. 지난해 5개를 따 특급호텔이 됐다. 향후 신관을 건설하고 온천을 개발해 워터파크와 리조트를 건설할 계획이다. 총 1천2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대구의 청와대, 달구벌의 알프스란 별칭을 재연하고 싶다. 호텔수성은 도심접근성이 그 어느 호텔보다 뛰어나고, 경관이 수려하다. 231㎡(7만평)에 달하는 수성못과 부지가 약 7만7천㎡(2만3천여평)인 호텔은 최고의 하모니이다. 대구에서 가장 큰 자립자족형 호텔인 셈이다. 호텔 뒤에 300가구가 취사 가능한 리조트를 건설해 장기임대를 할 계획이다. 호텔 수성은 삶에 지친 250만 대구시민과 대한민국, 더 나아가 세계인을 위해 심장이 쉬어갈 수 있는 휴양지와 쉼터로 만들겠다”

-수성못상가번영회가 업종 중복과 교통 혼잡 등으로 컨벤션센터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고 들었다.

“일부 반대하는 회원은 중복업종 상가다. 국제회의장을 비롯해 메디컬센터, 영화관, 명품관, 아웃렛, 은행 등이 입주할 예정이라 기존 수성못의 상권과 차별화된다. 경쟁과 대립이 아니라 상생관계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경관심의 통과를 위해 330㎡(100평)에 가까운 사유지를 무상으로 내놨다. 현재 호텔 앞 네거리를 2차선 회전교차로로 바꾸면 교통혼잡이 근본적으로 해소된다. 또 컨벤션센터 앞에 3천300㎡(1천평)의 광장을 조성해 시민에게 개방할 것이다. 호텔수성이 박 전 대통령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대형 조형물을 세우겠다. 앞으로 대구세계물포럼 등 국제행사를 대비해 명소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음 달 시삽이 가능할 것이다.”

-자수성가를 했나. 물려받은 재산으로 성공했나.

“경주시 월성군 산내면 덕동리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희망은 밥 세끼 배불리 먹는 것뿐이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겨울을 나기 위해 지게를 지고 10리도 넘는 험준한 산에 올라 땔감을 해 와야 했다. 간신히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공부하던 중 면서기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6개월간 다니다 더 큰 꿈을 꾸고 야간대학에 들어갔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토목기사 1급 등 11개의 자격증을 땄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대학 전체에서 차석으로 졸업했다. 영남대 대학원 도시공학과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도 배가 고팠다. 빵 한 끼로 하루를 때운 게 부지기수다. 그래서 몸이 반쪽이 됐다. 돈을 벌기 위해 석면현장에서 노가다를 했다. 3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 92년에 귀국해 1천만원 보증금으로 수성구 지산동에서 월세 15만원 단칸방에서 다시 시작했다.”

-남몰래 어려운 이웃을 많이 돕고 있다던데.

“돈을 벌겠다고 일을 하면 비참해진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돈은 따라오게 마련이다. 자신만을 위해 돈을 써선 안 된다. 10여년 전부터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경일대 학부·대학원생에게 지금까지 약 1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독거노인, 고아원 등에 매년 1억원 정도 기부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정치를 하려고 했던 적이 있나.

“14대 총선 때 대통령을 한번 해보겠다고 경주에서 출마했다. 1억2천만원을 쓰고 패가망신 직전에 정치를 포기했다.(웃음) 이후 전국구 의원과 국가요직 제안도 들어왔지만 거부했다. 국회의원 떨어진 게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성공신화 드라마를 찍고자 해서 ‘아직 배가 고프다’면서 거절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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