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경북여성 .7] 너무 일찍 꺼져버린 불꽃 ‘백신애’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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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2-01   |  발행일 2014-12-01 제10면   |  수정 2014-12-01
안온한 삶 거부하고 여성계몽·항일운동… 문학소녀 ‘저항의 펜’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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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는 2007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8년에는 영천 시민운동장 근처에 백신애문학비가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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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가 태어난 영천 창구동에는 그녀의 출생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백신애(白信愛, 1908~39)는 영천 출신으로,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면서 신춘문예 출신의 첫 여류작가가 되었다. 독서광이었던 백신애는 항일운동과 여성계몽운동에 투신했으며, 여성으로는 경북도 공립학교 교사 1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어여쁘고 총명한 부잣집 외동딸이었지만, 안온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식민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무지와 궁핍한 삶 그리고 시베리아, 만주로 떠도는 백성들의 참상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1927년 시베리아 방랑 중에 밀정으로 오인받아 일경에 체포되면서 고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그 경험을 살려 한국인의 생활상을 그린 단편 ‘꺼래이’를 발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8년 이혼 후 병이 도져 고생하다가 39년 췌장암으로 요절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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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

병약한 영천 부잣집 외동딸

오늘도 백신애는 책을 붙들고 있었다. 딸의 밥때마저 잊은 독서에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했지만 오빠 기호는 초연했다. 육신의 끼니는 다시 찾아오는 것이 순리이지만 정신의 끼니는 때를 놓치면 끝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오빠의 생각이었다. 백신애 뒤에는 늘 오빠 기호가 있었고, 따라서 그녀는 아무런 훼방 없이 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백신애는 영천 창구동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백내유(白乃酉)와 어머니 이내동(李內東)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백신애는 다섯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모두 공식적으로 쓰였다. 무잠(武簪), 무동(戊東), 술동(戌東), 신애(信愛), 박계화(朴啓華) 등이 그것이다.

5형제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백내유 집안은 영천의 뜨르르한 부자였다. 오죽하면 백씨네 5형제 돈이 마르면 영천의 돈도 다 마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집의 외동딸이었으니 누릴 것은 다 누릴 수 있었음에도 백신애는 병약했다. 하여 책에 빠져들었고, 그녀는 거의 광적으로 독서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만큼 신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높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에서 한문을 배우고 중학교 강의록을 봤으면 그만이지, 학교는 또 무슨 학교!”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교사가 된다는 전제하에 도립 사범학교 강습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입학생 40명 중에 홍일점이었던 백신애는 경북공립사범학교의 여교사 제1호가 되었으나, 1925년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성청년동맹’에 가입하면서 여성운동가의 길에 들어섰고, 이로 인해 권고사직 되었다. 말이 좋아 권고사직이지 그냥 쫓겨났다고 보면 되었다. 이때의 장면이 데뷔작인 자전소설 ‘나의 어머니’에 나온다.

‘오빠가 XX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던 내가 여자청년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일조(一朝)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이후 백신애는 상경했다.

‘혁명의 땅’ 시베리아 밟았지만…

“경북이 낳은 문인 중에서 백신애는 고월(辜月 李章熙, 1900~29), 육사(李陸史, 1904~44)와 더불어 혁명독립지사가 아닌가.”

목우 백기만(牧牛 白基萬, 1902∼69)의 증언이었다. 그 정도로 백신애의 활약은 대단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국을 돌며 강의도 서슴지 않은 실천적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1927년 백신애는 돌연 시베리아로 떠났다.

“혁명의 땅으로 명명된 그곳을 직접 밟아보리라.”

어려울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친 기운은 상상 이상이었고, 결국엔 그녀를 사지로 내몰았다. 며칠을 굶은 상태에서 마냥 거리를 걷다가 길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어디에나 착한 사마리아인은 있게 마련이어서 한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향. 하지만 쉬운 일은 없었다. 추방당한 몸으로 혈혈단신 두만강을 건너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고야 말았다. 밀정이라는 누명이 씌워졌고, 무자비한 고문이 이어졌다. 그녀의 몸은 급속도로 망가져갔다. 그러다가 천만다행으로 아버지의 힘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신춘문예 출신 첫 여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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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의 대표작 ‘꺼래이’.

과수원의 바람은 띄엄띄엄 불었다. 첫 바람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굳게 뿌리를 내린 비장한 나무들과, 초록빛 잎사귀와 색색의 열매를 꿈꾸는 낙관적인 나무들과, 항상 꼭대기를 하늘에 두고 뻣뻣하게 서있는 건방진 나무들이 줄을 지어 숨 쉬는 땅이었다. 반야월 과수원.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온 백신애는 바로 그 과수원에 머무르면서 글쓰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1929년 1월, 하룻밤을 꼬박 새워 단편 ‘나의 어머니’를 출산했다. 안락한 여성 부르주아의 삶을 향유하도록 요구하는 어머니와 투쟁과 참여의 삶을 추구하는 오빠 사이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 형상화된 작품이었다. 백신애는 이 작품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변방의 무명 여성이 이 나라 신춘문예 첫 당선자가 된 것이다. 과수원에서 열린 열매 중 가장 큰 열매였다.

이후 백신애는 1933년 결혼했고, 더불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4년,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단편 ‘꺼래이’를 내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꺼래이’란 ‘고려’의 러시아식 발음으로 일제의 총칼에 조국을 잃고 황량한 시베리아를 떠돌던 수많은 백성을 가리킨다. 말 그대로 ‘꺼래이’는 한민족의 유민들이 소련 땅에 입국했다가 추방당하는 실상과 그곳에 대한 체험을 한 소녀의 시각을 통해 적어 나간 신변 체험 소설이다.

훗날 백신애는 자신의 소설에서 ‘가난한 생활’을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하지만, ‘꺼래이’에서는 당당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낸다. 주인공인 순이는 잘못 하나 없이 감금을 당해도 그저 봉변을 당할까봐 겁이 나 주어진 상황에 끌려가기만 하는 코뮈니스트 청년들을 못마땅해한다. 그리고 분노하고 항거하여 좀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 간다. 이러한 순이에게 백신애는 마지막 부분에서 희망적인 미래를 부여한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할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우는 순이의 귀에 “순이야, 울지 말고 일어서라”는 바람 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말이다.

이외에도 백신애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적빈(赤貧)’ ‘복선이’ 그리고 ‘멀리 간 동무’ 등을 통해 당대 조선민중의 빈곤에 쫓기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고발했다.


이혼 그리고 이른 죽음


왕성한 작품활동에 비해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오빠 백기호의 아내인 허필숙은 이렇게 전한다.

“사상이 앞서가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혼 이후 글 쓰고 문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통 아낙네처럼 집안에 가둬두려고 하니 부부싸움이 잦았고, 가정폭력까지 당한 것 같아요.”

결론은 이혼이었다.

이후 백신애는 상하이로 움직였다. 애국부인단체와 인연을 맺고 있던 그녀에게 일경의 감시가 심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미행이 붙었고, 그녀는 40여일을 머무르다 귀국하였다.

그리고 문학을 위한 새로운 각오로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병약한 데다가 시베리아에서의 고난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까지 겹쳐 그녀의 몸은 엉망이었다. 이에 1939년 입원하였다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야 말았다. 췌장암이었고,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둘이었다.

슬픈 火花

파란만장이었다. 영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편안한 삶을 거부했고, 자신을 얽매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의 분위기에 항거하였으며, 존경하던 오빠를 따라 당대 남성 지식인들이 유행처럼 추구하던 사회주의 활동 및 이에 따른 여성운동의 길을 걸었다. 이후에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전향하여 소외된 이들의 아픔과 당대 지식인 및 중산층 사람들의 가식과 허위의식을 고발하면서 한 명의 주체적인 여성작가로서 활약했다. 하지만 죽음이 그녀의 꿈을 살라버렸다.

화화(火花), 불꽃처럼 살다 간 백신애. 그녀를 기리기 위하여 백신애 기념사업회에서는 2008년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백신애 문학상’을 제정하였고, 올해 7회까지 수상작을 냈다.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 기획: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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