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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자신의 연극 이해하는 천사 착각
생활비는 못주어도 술은 안떨어져
위암 판정받고 제2 이송희 만들자 다짐
술·담배 끊고 연기·연출로 분주한 나날
1979년 영남대 천마극단에 들어간다. 81년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극단 원각사의 ‘무엇이 될꼬 하니’에서 거지 역을 맡는다. 프로 배우로서의 첫발이었다. 대구 연극의 황금기였다. 84년 극단 우리무대 창립 멤버로 들어간다. 그때 대구 MBC 프로그램 ‘파수꾼’이란 코너에서 ‘대구 연극을 지키는 사람’으로 주목받을 정도로 빠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당시 프로듀서가 앞으로 연극할 건지를 물었다. 대학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이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가족과 지인들이 ‘이송희가 연극에 미쳤다’로 낙인찍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수업 마치고 연습실을 오가며 심지어 버스 안에서도 집 옥상에서도 연극 생각뿐이었다. 당시 영대 캠퍼스엔 두 명의 명물이 있었다. 이송희와 현재 대구MBC FM MC로 활동 중인 류강국이었다. 둘다 천마극단 멤버 겸 응원단원이었다. 현재 혜화여고 김종백 수학선생까지 모이면 연극에 미친 영대 3총사가 되었다. 그는 이성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걸어갈 때도 중얼중얼 대사를 치면서 간다. 너무 엄숙하고 진지한 괴물이라서 접근불가 인물이 된다.
집에서는 난리가 난다. 그가 장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서울로 도망친다. 극단 민예와 현대극장 두 곳에서 한수 배우고 10개월 있다가 낙향한다. 서울 사람의 텃세 때문에 더 고독했다. 그때는 일정한 월급이 없었다. 연기할 수 있다는 게 월급이었다.
85~88년 구 시립도서관 맞은편에서 슈퍼마켓 주인이 된다. 거기서 먹고 잤다. 92년 그가 주축이 되어 만든 극단이 이송희 레퍼토리. 구 KBS 근처 가람아트센터에 깃을 튼다. 부업이 절실했다. 89년부터 93년까지 KBS대구방송총국에서 일을 한다. 극단은 동인제 형식으로 운영된다. 공연 수입은 일차적으로 임차료로 지불되고 추가 수입이 나면 나누고 없으면 못가져가는 식이다. 효도 차원에서 31세에 결혼한다. 결혼을 너무나 단순하게 여겼다.
“결혼은 결혼이고 내 연극은 내 연극이라고 우겼다. 낮과 밤이 바뀌었다. 아내가 출근할 때 나는 자고 아내가 퇴근할 때 난 극단에 나갔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연극에 정신이 팔려 잘 봐줄 수가 없었다. 보모와 어린이집에 의지한다. 연습을 마치면 밤 10시부터 쫑파티 같은 소주판이 기다렸다. 극단에서도 먹기도 하고 근처 식당에서 취할 때까지 마셨다. 고주망태가 돼 택시를 타고 반야월 집까지 실려갔다. 생활비는 못주어도 술은 안 떨어졌다.
“아내가 내 연극을 이해하는 천사인 줄 착각했다.”
96~97년 가장 힘들었다. 점점 단원들도 빠져나가고 연습실도 여기저기로 옮겨다닌다. 현실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한때 대구 최고의 이송희였는데….”
그런데 추락하는 이송희만 보였다. 괴팍한 성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일찍 올라가버렸다. 30대 접어들면서 목표가 없었다. 어디까지 가야할지 몰랐다. 다 온 것 같았다. 술에 의존하니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98년 대구시립극단 훈련장으로 들어간다. 주위에선 ‘당신은 배우인데 왜 자꾸 자리에 연연하느냐’란 소문도 들렸다. 위기가 찾아왔다. 2012년 위암판정을 받는다.
암이 그를 돌아보게 했다. ‘제2의 이송희 만들기’에 돌입한다. 3년5개월째 술을 안 마시고 있다. 담배도 안한다.
최근 김태수 원작 ‘명배우 황금봉’에서 한때 최고의 연기자였지만 쓸쓸한 말년을 맞은 황금봉 연기를 했다. 황금봉은 바로 자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배우의 추락은 욕망의 추락일 뿐 그 누구도 배우를 추락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그는 “배우는 단지 돈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의 온기를 먹고 산다”고 말했다.
요즘 대구연극제에 출품할 ‘꿈에라도 넋이라도’(김인경 극본) 연출에 분주한 나날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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