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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신분으로 극단 처용 스카우트
대구연극제 참가해 연기상까지 받아
후배들 서울 가면 무료로 쉴 수 있게
게스트하우스 마련하는 것이 꿈이죠
고1 때 우연히 연극을 봤다. 계명대 극예술연구회의 작품 ‘찾아온 사람’이란 연극이었다. 충격이었다. 연극배우가 꿈에 나타났다. 만약 계명대에 오면 연극반에 들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심리학과에 들어갔지만 실은 연극과 학생으로 통했다. 데모·연극·술판을 오갔다. 연극 아니면 인생도 없다고 여겼다.
배우를 꿈꾸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걸쭉한 목소리 톤 때문에 배역 한계로 인해 연출가로 내몰렸다. 연기 지도하는 과정에 후배와 갈등을 빚는다. 그때 배우가 날린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렇게 잘하면 당신이 연기해봐라.’이 말이 결국 그를 배우로 만든다. 배우 선언을 하고 술과 담배를 끊었다. 몸 만들기가 우선이었다. 팔 동작을 반복하다가 한계가 오면 즉시 다리 동작을 실신할 때까지 했다. 온몸이 피곤하면 덜 피곤한 부위를 바꿔가면서 훈련했다. 연극 관련 원서까지 독파했다. 지옥연습의 나날이었다. 85년에 계대 노천극장에서 ‘만리장성’이란 연극에서 진시황제 역을 멋지게 소화해 낸다. 86년 학생 신분으로 극단 처용에 스카우트 된다. 87년에도 학생 신분으로 대구연극제에 참가해 연기상을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괴물’이 찾아온다. 바로 정치였다. 연극하면서 시민운동권 인사와 자주 술자리를 하고 정치행사의 사회도 자주 봤다. 그의 연극적 캐릭터를 정치권에서 탐을 냈다. 싫다고 했는 데도 칠고초려 당해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대구동을 지구당 위원장이 된다. 그해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꼴찌는 아니었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연극을 하기 위해선 스스로 먹고살아야 한다. 앞으로 나는 연극 해야 되니깐.”
불로동 목공예 단지에 찾아가서 출퇴근 맘대로 하고 일을 좀 하자고 부탁했다. 월급은 사장 맘대로 하라고 했다. 낮에는 목공예, 밤에는 연극을 했다. 87년 덜컥 결혼한다.
정치를 통해 이룬 일도 더러 있었다. 대구 패션어패럴 단지 시행에도 간여했고 인신매매 당해 티켓다방 떠돌던 여성을 집으로 돌아가게 도와주었다.
갑자기 정치가 싫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봤는데 자신이 너무 사나워졌기 때문이다. 옛날 자기 얼굴이 아니었다. 제 얼굴을 찾기 위해 강원도 원주 치악산 소쩍새마을로 들어간다. 일종의 ‘연극적 만행’인 셈. 4년간 장애인과 동고동락했다. 모두 이동학이 연극판을 떠났다고 했다. 그로선 ‘연극 공백기’.
“연극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다. 연극을 통해 도를 닦고 있다. 연극 그 자체가 절대 날 구속하지 못한다. 연극도 생활의 일부분이다.”
하산 이유가 재밌다.
“독사 때문에 하산한다. 첫 해는 독사가 날 보고 도망갔다. 두 해째는 슬금슬금 도망갔다. 세 해째는 도망을 안갔다. 마지막에는 날 인간 취급을 안했다. 내가 자연과 너무 동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완전 동화되면 안될 것 같아 두려웠다. 때를 더 묻히기 위해 사회 곁으로 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생활정보지 배달부터 했다. 오전 10시까지 일하고 다시 학원버스 기사가 되었다가 파김치가 된 채 밤에는 연극을 했다. 프리랜서 연극인 시절이었다. 육체적으로는 무척 고됐지만 보람 있었다. 젊은 시절 고성방가하면서 돌아다닌 시내 길에서 이젠 생활정보지를 꽂고 있었다.
“세월한테 진 빚을 갚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연극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가정경제도 책임져야 된다고 믿었다. 투잡 스리잡은 당연지사.”
이제 시립극단 11년차. 아이가 셋이다.
연극배우란 뭘까? 그는 “인류 극소수 진실된 사람”이라고 믿는다. 달의 궁전, 인연, 바리새인, 고백 등 영화 출연도 잦은 그는 대스타가 되면 서울에 지방서 올라온 후배가 무료로 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마련하고 싶단다. 숙박료는 성공하면 대구를 위해서 활동을 하겠다는 약속이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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