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유일의 한글 매체…한국 정부·단체 재정적 지원 절실”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배윅토리아 새고려신문 사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2/20160201.010060727460001i1.jpg) |
1999년 6월1일 새고려신문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신문사 사원들이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배윅토리아 새고려신문 사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2/20160201.010060727460001i2.jpg) |
새고려신문을 보는 사할린의 어린이들. 신세대에게 모국어와 한민족의 얼을 되찾아주고 한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새고려신문이 광고수입이나 재정지원이 미약한 상태에서 한글을 이해할 수 있는 3∼4세 동포마저 계속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배윅토리아 새고려신문 사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2/20160201.010060727460001i4.jpg) |
1990년 7월 새고려신문이 주최한 이산가족만남 계획프로젝트에서 가족을 만난 한인 동포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배윅토리아 새고려신문사 사장 제공> |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배윅토리아 새고려신문 사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2/20160201.010060727460001i3.jpg) |
우리 민족이 해외에서 터를 잡으면 가장 먼저 세우는 것이 학교였다. 먼 이국땅에서 모국어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에 교육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할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복과 함께 한인들이 몰려든 코르사코프에 1945년 조선학교가 문을 열면서 사할린 전역에 조선학교가 세워졌다. 1950년에는 72개 학교와 5천30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1963년에는 32개교에서 7천200여명의 학생이 수학했다. 모국어로 된 교과서, 교재가 부족했고 사범대학을 졸업한 한인교사도 없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지만 교육에 대한 열망만은 뜨거웠다. 하지만 1964년 민족교육의 구심점이던 마지막 남은 조선중학교가 문을 닫았다. 흐루쇼프 서기장이 ‘러시아어 단일교육’을 내세우며 민족학교를 폐교시킨 것이다.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학교를 대체한 것은 언론이었다. 1949년 하바롭스크에서 창간된 ‘조선로동자’ 신문이 1950년 사할린으로 이전하면서 민족신문으로 발간됐다. 1961년 ‘레닌의 길로’, 1990년 ‘새고려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배윅토리아(51·한국명 배순신). 올해로 창간 67년을 맞는 사할린 유일의 한국어 신문인 새고려신문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다.
◆ 한인3세, 이산의 슬픈 역사를 잇다
배 사장은 1965년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시에서 태어났다. 한인 3세다. 배 사장의 외할아버지는 강제모집으로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왔다. 외할머니는 그 뒤 남편을 찾아 사할린으로 왔다. 그 때 배 속의 아이가 배 사장의 어머니 이행자씨다. 배 사장의 부모님은 러시아에서 세명의 여동생을 더 낳았다.
유별난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네자매 모두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러시아에서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배 사장의 할아버지는 소련 국적 취득이 향후 귀국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국적자로 남아 어려운 삶을 이어왔다. 무국적자는 당국의 허락없이 다른 지역, 15분 이상의 거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무국적자의 신분이기에 정식 직업을 갖지 못하고 막노동과 바느질로 호구지책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 사장의 기억 속의 조부모와 부모는 먹고살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죽어라 일하던 모습, 밤이면 몰래 이불을 덮어쓰고 한국의 라디오 채널을 잡으려고 애쓰던 모습으로만 남아있다.
한글 신문 이끄는 사할린 한인 3세
한민족 정체성 유지 남다른 자부심
직원 5명뿐…기사는 혼자 쓰다시피
독자층 엷어 심각한 경영난 시달려
“90년 이산가족 행사 참석한 동포들
태극기 보며 눈물흘리던 모습 생생”
◆ 타이피스트에서 신문사 사장으로
배 사장은 극동국립종합대학교 저널리스티크(기자)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레닌의 길로’에서 시작한 신문사 일은 밑바닥부터였다. 타이피스트, 기자, 상급기자를 거쳐 2006년, 사장이 되었다. 현재 ‘배순신 기자’라는 한국 이름으로 새고려신문의 취재와 편집을 거의 혼자서 도맡아 하고 있다.
“사할린에서는 1964년에 마지막 조선학교가 폐교됐어요. 그 뒤 25년 만에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범대학(현 사할린국립대)에 한국어 강좌가 생겼죠. 숱한 역사의 우여곡절 속에서 꿋꿋이 우리말로 발행해 온 새고려신문이 아니었다면 사할린에서 과연 한글이 보존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남다른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33년째 새고려신문에서 일해온 배 사장은 안톤 체호프 명칭 기자콩쿠르 수상, 사할린주정부 표창, 사할린주 두마(주의회) 표창, 러시아연방 통계청 메달 등 굵직한 언론상을 휩쓸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표창과 한국 국회를 비롯한 러시아 여러 기관의 감사장도 수여했다. 2007년부터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으로, 1999년부터 2012년까지는 ‘코레이스키 클럽’ 사할린주 청소년단체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 창간 67년 역사의 러시아 유일 한글 언론
한인 동포가 취재하고 기사 쓰고 한글로 찍어내는 신문으로는 러시아 전체에서 새고려신문이 유일하다. 하지만 ‘우리신문’이라는 가치와 위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중단없는 신문발행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새고려신문은 배 사장이 입사할 때만 해도 기자만 15명에 이르었다. 일요일과 월요일을 빼고 일주일에 5일 신문을 내던 시절이었다. 당의 기관지였기 때문에 발행 환경이 안정된 덕분이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러시아사회가 격변하면서 새고려신문은 1990년대 이후 만성적인 위기 상황이다. 사할린 3만여 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엷은 독자층으로 인한 광고수입의 부족과 러시아나 한국 정부 및 기관으로부터 변변한 지원을 받지 못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더구나 한글을 읽을 수 있는 1∼2세대가 지속적으로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거나 사망하고 있는 가운데 한글을 가르치는 학교마저 없어 그 미래도 불투명하다. 직원이라야 겨우 5명, 기사는 배 사장이 거의 혼자 쓰고 있다.
배 사장은 “광고수입이나 외부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미약한 상태에서 한글을 이해할 수 있는 3∼4세 동포마저 계속 줄어들어 큰 걱정”이라며 “현재 사할린 주정부와 한국의 재외동포재단에서 약간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으나 운영비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70년 가까이 러시아 유일의 한글매체로 사할린에서 사라져가던 한민족의 문화와 한글을 유지해온 새고려신문이 앞으로도 애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외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경영상태 어렵지만 신문 포기할 수 없어
소련 연방 해체 시기 이후 새고려신문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한러 외교 수립 등으로 신문지상에는 본격적으로 사할린한인들의 이산가족문제, 귀환문제, 강제징용피해보상 문제 등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 새고려신문은 이산가족을 찾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신문에는 친척을 찾는 기사와 편지들이 실렸다.
1992년 1월1일부터 신문은 공식적으로 사할린주 공산당위원회의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사할린주에서 발간하는 정론지인 동포신문으로서의 위상을 갖췄다. 그러나 문제는 재정이었다. 이미 1990년대 초 많은 기자들이 신문사를 떠났다.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임금조건으로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보내주기도 하고 여러 기관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며 여러번 힘들게 그 위기를 넘겨왔다.
배 사장은 기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1990년 7월 신문사가 주최한 인기가수 대공연과 이산가족만남 계획프로젝트를 꼽는다.
이틀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가장 큰 스파르타크 운동장에서 3만명 정도의 관객이 모였다. 공연을 보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에서 한인 동포들로 만원을 이룬 전세기가 날아오기도 했다. 이때 신문사는 사할린 상공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반세기만에 게양된 태극기를 보고 많은 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우글레고르스크에 살고 있던 배 사장의 외할머니도 오셨다. 외할머니가 타고 온 버스 승객 대부분이 배 사장의 방 3칸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머물렀다. 그날 밤 배 사장은 아파트 복도에서 잠을 잤다. 한국기를 나눠주며 행사를 진행했던 그 순간은 숨막힐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행사를 진행하던 기자들도,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도 온통 눈물바다였다. 배 사장은 기쁨에 겨워 펑펑 울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고 했다. 할머니는 소원하던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진 못하고 고향이 한눈에 보이는 바닷가에 묻혔다.
“지금도 사정이 매우 어렵지만 새고려신문을 포기할 수 없다”는 배 사장은 “신세대에게는 모국어와 한민족의 얼을 되찾아주고 140여개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다민족 사회 러시아에 한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의 위상을 인식시켜 사할린 한인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새고려신문이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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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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