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食客열전 제1회 - 한국 최초 음식칼럼니스트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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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2-26   |  발행일 2016-02-26 제42면   |  수정 2016-02-26
“니들이 맛을 알아?”…400년 전 허균 ‘도문대작’으로 미식의 門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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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음식 전문가인 정관 스님의 도움을 받아 개발된 달성백년밥상. 제철 재료와 천연양념의 힐링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탤런트 최불암. 그가 2011년부터 전국을 누비며 만들고 있는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수사반장 최불암보다 ‘식객 최불암’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간 256번이나 맛기행을 떠났다. ‘조선음식상식’을 적은 육당 최남선, 서울 600년의 문화진객이었던 조풍연, ‘별미기행’의 대명사 소설가 백파 홍성유도 어른거린다. ‘방랑식객’ 임지호도 생각나고, ‘식객’이란 만화로 한 시절을 풍미한 허영만도 생각난다. 대한민국발 ‘식객의 족보’. 언젠가부터 깔끔하게 정리해보고 싶었다. ‘식객열전’, 이름도 그럴싸하다. 그런데 너무 힘든 작업이다. 진검 제철음식을 찾아 방방곡곡 파고드는 미식가·식도락가들이 급증일로. 이들 뒤를 잘 쫓아다녀 본다면? 관광형 맛집에 적이 실망한 맘을 실속 있게 달랠 수 있는 방도를 얻을 것이다.

식객(食客)! ‘현대판 나그네 풍류객’이랄까. 아무튼 이들의 안목과 내공은 엄청나다. 대한민국 대표 식객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의 급소, 특정 지역 대표 식객이라면 그 지역의 제약조건을 손금처럼 들여다볼 줄 안다. 모르긴 해도 우리의 또 다른 ‘인간문화재’인 것 같다.

식객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루에 10끼라도 감내한다. 자정 무렵에도 셰프가 만나자고 하면 달려간다. 하지만 소문난 식당에 잘 안 휘둘린다. 집잠보다 노숙에 더 적응된, 어떻게 보면 ‘금수저 팔자’이고 어떻게 보면 ‘반풍수 집안 망하게 할 인물’인 것 같다. 아무튼 문필가의 재질, 방랑벽, 셰프적 감각, 까탈스러운 식성, 호기심, 사교력, 다큐멘터리즘 등이 안분되어 있어야 이 바닥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을 부르는 명칭도 시대 따라 아주 다양했다. 과객, 푸드에세이스트, 음식칼럼니스트, 여행작가, 맛칼럼니스트를 거쳐 방랑식객까지 진화했고 이어 파워 푸드블로거까지 먹방, 쿡방에 이어 각종 신문과 잡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섬의 먹거리만 찾아다니는 ‘섬 푸드스토리텔러’도 생겨났다. 서울에는 ‘븟(부엌)’이란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통해 셰프들을 위한 ‘식재료 탐사여행 프로젝트 리스(LISS)’도 성업 중이다.

전국의 유명 식객을 한데 모으면 ‘음식으로 본 한국사 한 권’이 태어날 것 같다. 이제 강호의 고수 같은 식객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본다.

◆ 한국 최초의 음식칼럼니스트는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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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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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성소부부고’ 중 ‘도문대작’ 부분.

다들 허균(1569~1618)을 꼽는다.

물론 고려의 이색,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수운잡방’이란 고조리서를 집필한 김유, 실학파의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정약용·정약전 형제, 추사 김정희 등도 식객의 범주에 넣는 식품사학가들도 있다.

역시 조선조 식객문화는 유배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자였던 허균은 천재였지만 ‘서자필패(庶子必敗)’세상인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도통 없었다. 그런 탓에 그는 불우한 문인이나 시인들과 어울렸다. 또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 승려, 무사, 기생 등과 한 패가 되어 술로 보냈다.


조선 식객문화는 유배문화와 밀접
‘홍길동전’ 쓰기 1년 전인 1611년
귀양지서 이전 식도락 기억 되살려
‘다식은 안동, 약밥은 경주…’ 기록
첫 팔도 별미 134가지 체계적 소개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 탓이었고 또 예교(禮敎)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를 깔보고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하고 강릉 경포대 옆 초당순두부 탄생의 주역이 되기도 한 초당 허엽의 아들이다.

허균은 짱짱한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서경덕의 수제자 격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동인의 거두였으며, 그의 맏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이다. 그의 둘째 형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했다. 또 누이는 여류시인 난설헌이었다. 이런 가정배경이다 보니 어릴 적부터 류성룡과 같은 명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허균은 이때부터 당시 서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알았다.

그 시절 선비들은 여성 이상으로 음식에 민감했다. 그 음식은 ‘제수(祭需)’였다. 기제사 제수는 반드시 남성이 장을 봐왔고 진설도 남성의 몫이었다. 그러니 통과의례 관련 식재료의 본질에 대해서도 탁월한 안목을 가질 수밖에. 봉제사 접빈객의 본질은 결국 음식이었다. 그 음식을 통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할 수 있었다. 종가의 종부와 종손은 매월 닥치는 기제사 등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내림 전통음식에 대한 매뉴얼을 후대에 전승해야만 했다. 반가의 음식은 맛보다 정성이었다.

◆ 요리했던 선비들

그런 배경을 안고 한국 첫 한글 고조리서로 기록된, 정부인 안동장씨(장계향)가 1670년 지은 ‘음식디미방’보다 130년 앞서 안동의 한 선비가 가전된 통과의례식에 대한 레시피를 총정리한다.

바로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안동 군자마을(안동시 용상동) 출신인 탁청공 김유에 의해 저술된 요리책이다. 2012년 5월14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35호로 지정되었다.

‘수운(需雲)’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를 뜻하며, ‘잡방(雜方)’은 여러 가지 방법을 뜻한다. 즉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의미한다. 상·하권 두 권에 술 빚기 등 안동 지방 121가지 음식의 조리법을 담고 있다.

선비는 맛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음식 자체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그들은 배부른 걸 부덕하고 민망스럽게 여겼다. 허기를 조금 면하면 수저를 놓고 밥상을 수하에게 물린다. 더 배고플 것 같은 수하에게 밥상을 너무 양보하는 바람에 더없이 수척할 수밖에 없는데, 그 형상을 유림에서는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 해서 선비의 미덕으로 존수했다. 안동 반가에선 양상수척을 체면치레로 봤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재난이 들면 왕 역시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아예 밥상을 물리는 ‘감선(減膳)’, 또는 고기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철선(撤膳)’, 신하들과 당파싸움을 다스리기 위해 이른바 단식투쟁인 ‘각선(却膳)’도 불사했다.

이런 마당에 선비가 전국의 진미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기록을 보면 선비들도 끼리끼리 모인 자리에선 ‘식탐’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좋은 차를 마시고,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했다. 심지어 불교가 절정이었던 고려 시대 때도 한국 불고기의 원형으로 지목받는 ‘설야멱(雪夜覓)’을 즐겼다. 연암 박지원의 ‘연암일기’에도 ‘눈 오는 날 친구와 뜨거운 화로 위에 번철을 놓고 조미한 쇠고기를 구워 먹는 난로회’를 즐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새해 첫날 임금 앞에서 ‘단향회(檀香會)’를 벌이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단향회란 ‘박달나무 숯불에 구운 대나무꼬치를 먹는 모임’이다. 설야멱의 선배는 고조선발 맥적(貊炙), 이것이 근대화 과정에 ‘너비아니’란 이름을 갖게 된다.

입맛과 식탐이 남달랐던 선비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목격할 수 있다. 고려 말의 충신이자 조선에 성리학을 들여온 이색도 고려의 먹거리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남겼다. 워낙 식탐이 심했던 그는 이를 뽑은 뒤 맛있는 걸 먹기 힘들어졌다며 슬퍼하기도 했단다. 여섯 임금을 섬긴 서거정은 게장이라면 눈이 뒤집어졌고, 박제가는 한자리에서 냉면 세 그릇, 만두 100개를 먹는 대식가로 오해받기도 했다.

◆ 한국의 첫 미식가이드북…도문대작

아무튼 허균은 1611년에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을 펴낸다.

도문대작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국내 첫 팔도 맛 평가서로 불리는 이 책은 허균이 전북 익산의 함열로 귀양 갔을 때에 쓴 책으로 귀양지에서 거친 음식을 먹게 되자 전에 먹었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허균은 서문에서 ‘조선시대 남성 학자들이 식생활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며 경계의 글을 남겼다.

이 책은 당시의 먹거리를 병이지류(餠餌之類·떡류), 과실지류(果實之類·과일류), 비주지류(飛走之類·날짐승류), 해수족지류(海水族之類·어패류), 소채지류(蔬菜之類·푸성귀) 등으로 나눠 모두 134가지 음식을 소개했다. 곰발바닥, 표범 태반, 사슴 꼬리와 혀 등까지 기록한 것으로 보아 허균은 대단한 미식가인 듯하다. 백산자(박산·쌀로 만든 백당을 고물에 묻혀 먹는 한과)는 전주, 석이병은 금강산, 다식은 안동, 엿은 개성, 약밥은 경주 등이 잘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사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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