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4.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

  • 백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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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15   |  발행일 2016-08-15 제5면   |  수정 2022-05-18 17:39
일본 학교의 심한 차별 극복…부친 파친코 사업 승계해 키워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와 그의 어머니(송영자씨)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
일본 지바시 주오구에 위치한 히데카즈 상사 전경.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
지바 경북도민회 회원들이 사무실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사>인문사회연구소 제공>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

中때 멀리뛰기 선수로 지바市서 최고 기록
고향왔다가 모국어 몰라 충격…한글 공부 전념
한국사회 재일동포 밀어내는 것 같아 서운
부친은 고향에 다리 놔주고 학교에 책 기증


‘재일 조선인’들은 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가야 했다. 일본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 뿌리는 달라 차별을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당연한 일이라 받아들여야겠지만 거기서 오는 억울함의 무게는 평생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차별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독(毒)이자 약(藥)이기도 했다. 일본인들과는 출발점이 달랐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든지 뛰어나야 했다. 생존본능인 셈이다. 또한 재일 조선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잊히는 걸 두려워 했다. 자신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알아주길 바랐다. 우리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재일 조선인들의 노력과 마음가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 밀항과 파친코로 이어진 재일 조선인의 정착사

재일 조선인 2세 정동일 히데카즈 상사 대표(59)의 뿌리는 경북 영일군 죽장면(지금은 포항시로 통합)이다. 정 대표는 현재 지바 경북도민회 부회장도 맡고 있는데, 그의 부친(고 정연수)이 초대 회장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스무살 때쯤 밀항을 통해 일본에 정착하게 됐다. 교토에 살고 있던 집안 형님을 찾아 공부를 할 요량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상했다. 밀항은 당시 조선인이 일본에 건너오던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는 교토에서 리츠메이칸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집안 형님을 도와 토목일을 했다. 이후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도쿄로 올라와 파친코 기계를 판매하는 일을 했다.

정 대표의 부친은 1985년, 현재 히데카즈 상사(지바시 주오구 소재)가 위치한 곳에서 일본인과 함께 파친코 영업을 위해 건물을 지었다. 정 대표는 “아버지께서 목재 등 건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발품을 팔아 직접 사서 4층 정도 되는 건물을 직접 올렸다. 최대한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을 시작한 후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던 일본인이 노름빚을 져서 사업에서 빠지겠다고 했고, 아버지가 영업장을 혼자 꾸렸다. 장사가 잘돼서 영업장을 다섯 곳 정도 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밤낮없이 돈을 버느라 몸을 잘 돌보지 못했고, 결국 간암으로 1990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재일 조선인 상당수는 파친코 사업에 종사했다. 파친코 사업은 현재 연 매출 30조엔에 달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서비스업으로 확실히 자리를 굳힌 상태다. 지금도 파친코 점포 소유자 5명 중 4명이 재일동포이며, 일본인들은 파친코가 재일동포 고유의 사업이라 생각할 정도라고 한다.

◆ 일본에서 맞닥뜨린 높고 두터운 벽

정 대표는 “일본학교에 다녔는데 차별이 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종종 일본인 친구집에 가서 장난감을 갖고 놀았는데, 부모들이 ‘그 집(조선인) 아이들과 놀지 마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듣곤 했다”며 “그래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는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학교에 와서 운동장에서 축구나 야구 등을 하며 놀았다”고 말했다.

조선인은 일본 학교에서 ‘미운 오리 새끼’일 따름이었다. 정 대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며칠 동안 합숙 생활을 하며 겪은 일이 잊히지 않는 듯 한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육상부에서 활동했는데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아서 25㎞ 정도 떨어진 집까지 다녀와야 했다”면서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전차까지 고장나서 할 수 없이 친구에게 자전거를 빌려서 다녀왔다. 도착하니 밤이 늦어서 선생님께 혼났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담당 교사로부터 슬리퍼로 맞았다고 한다. 교사는 일본군 출신이었다.

정 대표는 “그날 같은 방을 썼던 4명의 친구(일본인)도 다른 지역에 있는 아이스링크로 놀러 갔었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시각에 숙소에 도착했지만 체벌은 없었다”며 “정말 억울했던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중학교 때 육상부에서 멀리뛰기 선수로 활약했는데, 지바시에서 가장 좋은 기록(6m24)을 갖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공부도 곧잘 했지만 고등학교에서부터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 한국 사회에서 잊히지 않기를

정 대표는 대학교 때 처음으로 고향에 올 기회가 있었다. 정부 초청으로 이른바 ‘고향방문단’이 꾸려졌는데 여기에 포함됐던 것이다. 당시 취재를 나온 한 언론이 인터뷰를 위해 정 대표에게 마이크를 들이댔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충격이 컸다. (한국인임에도) 정말 단 한마디도 못했다”며 “이때부터 한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대표가 기억하는 한국 사회는 ‘재일 조선인’을 자꾸 밀어내기만 했다. 그는 “20대 중반에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한국을 찾았는데, 당연히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았다”며 “한국어를 못하는 우리를 보고는 ‘왜 우리말을 못하느냐?’고 따져 물었다”고 했다. 이어 “심지어 입국심사대에서 짐을 열어보라고 하기도 했다. 김해공항과 김포공항 다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다.

정 대표는 “재일동포(재일 조선인)의 경우, 학교가 거의 없어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부모에게 배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마저도 생계에 바빠 여의치 않았다”며 “우리끼리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조국에 서운했다”고 말했다.

정 대표의 아버지는 1965년 고향을 찾아 열악한 현실을 목격한 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여러 곳에 다리를 놓고 초등학교 도서관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기증하기도 했다. 당시 조국에서의 새마을운동이 활기를 띨 수 있도록 앞장섰다는 그의 아버지. 재일 조선인의 겉모습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그들의 속내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도쿄 등 4개 지역 집단 거주…경북 출신은 ‘도민회’ 꾸려
▨ 在日 조선인과 경상북도 도민회


재일 조선인은 주로 4개 지역에 모여 살았다. 이들은 △도쿄 신오쿠보 △오사카 이쿠노구 △교토 히가시쿠조 △고베 나가타구 등에 집거지를 이뤘다.

신오쿠보(도쿄)의 경우, 2차 세계대전 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 일대 철교 밑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에 제한이 없어진 후 인구수가 늘었다. 한류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 대중문화 전파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이쿠노구(오사카) 역시 88올림픽 이후 2·3세대를 중심으로 ‘코리아 타운’이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교토(히가시쿠조)는 조선인들이 국철 등 대규모 토목 공사에 동원되면서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서러운 기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1세대 조선인이 많아 우리의 전통 문화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재일동포와 일본인의 협력 모델이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가타구(고베) 역시 대규모 철도 부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출발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 재일동포의 신발공장 80% 정도가 문을 닫을 정도로 타격이 컸지만, 이 지역의 재일동포와 일본인, 외국인이 협력해 지진 피해를 복구한 공동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편, 현재 경북 출신 재일동포는 ‘경상북도 도민회’를 꾸려 정을 나누고 있다. 1·2세대가 주축이며 일본 내 모두 7개 지역(도쿄·오사카·지바·가나가와·교토·오카야마·효고)에 분포해 있다. 회원수는 적게는 50여명에서 많게는 700명에 육박한다.

이들 도민회는 고향에 도움의 손길을 지속적으로 건넸다. 단적으로 1985년 설립된 지바 경북도민회의 경우, ‘대구지하철공사 폭발사고 복구비 지원’(1995년), ‘홍수 피해 입은 경북지역에 쌀과 수재의연금 지원’(1998년·2002년),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위문금 전달’(2003년), ‘세월호사고 의연금 전달’(2014년) 등을 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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