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11] 대구의 젖줄 신천, 그리고 물길에 대한 오해와 진실

  • 백승운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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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1   |  발행일 2018-01-11 제13면   |  수정 2018-01-26
한 줄기 생동하는 물길 新川은 풍경도 우리의 일상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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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가지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하는 신천의 전경. 대구의 젖줄로 불리는 신천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대구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사진은 늦가을 신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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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수성구 상동교 옆 이서공원에 들어서 있는 비각(왼쪽)과 3기의 비석. 왼쪽 2기는 대구판관 이서를 기리는‘이공제비’이고, 나머지 1기는 대구군수 이범선을 위한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다.

겨울은 깊어 바싹 말랐지만 천(川)은 은은한 은빛으로 부서진다. 산란하는 빛은 돌풍처럼, 새 떼처럼, 혹은 이파리처럼 물결 위에 떨어져 요동치다 이내 스며든다. 그 모습이 그지없이 호젓하고 흠 없이 매끄럽다. 빛을 품은 천은 한적한 산과 솟구친 빌딩의 호위를 받으며 묵묵히 제 갈길을 간다. 멈춤도 없이 쉼도 없이 오로지 한 길로 이어진다. 천천히 흐르다 굽이치고 이내 다시 속도를 조절한다. 그 물길을 따라 호젓하게 걷는 정취도 좋고, 한적한 산을 건너다보는 풍취도 그만이다. 제 계절을 맞은 수목과 사철을 가리지 않는 나들이객의 동적인 생명력이 물가를 채운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물길을 스치며 조잘대는 바람 소리 들린다. ‘밤의 천’은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고요히 흐르는 천과 은은한 조명, 주변의 화려한 빌딩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도시의 정형화된 건물조차 물길 옆에서는 그윽하다. 낯설지 않은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이 쉼 없이 굽이치는 물길이 만든 작품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렇게 물길을 따라 생동하고 움직인다. 직선의 삶을 잠시 벗어나 곡선의 여유를 발견할 수 있는 곳, 대구의 젖줄 ‘신천’이다.

 총 길이 27㎞…발원지는 두 곳
용계천·금호강·낙동강과 만나

청동기 이래 바뀌지 않은 물길
新川 명칭 탓에 끊임없는 오해
“몇몇 지역의 신천은 샛강 뜻해”
1776년 대구판관 부임한 이서
신천제방 비용 사재 털어 마련
이서공원엔 그를 기리는 비석


#1. 신천의 발원지와 지리적 특성

신천은 대구 시가지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한다. 총길이는 27㎞, 유역면적은 159.8㎢에 달하는 대구의 중심하천이다. 발원지는 두 곳이다. 하나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우미산 남서쪽 밤티재 부근이고, 또 다른 발원지는 비슬산 북동사면에서 흘러나오는 총길이 13㎞에 이르는 용계천 상류다.

밤티재에서 출발한 신천은 달성군 용계리 가창교 남쪽에서 신천의 지류인 용계천과 합류해 북구 침산동 침산교 부근에서 금호강과 만난다. 신천을 품은 금호강은 다시 낙동강을 만나고 물길은 어울리고 섞여 한 달여의 대장정을 끝내고 바다에 이른다.

특히 신천은 대구의 산과 고개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조우하며 어우러지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동으로는 상원산·동학산·병충산·대덕산·당고개·두리봉·모봉·형제봉·연암산과 조우하고, 서로는 비슬산·청룡산·달비고개·월배산·앞산의 고산골 서편 능선·침산과 만난다. 또 남으로는 비슬산·헐티재·통점령·밤티재·삼성산·상원산과 어우러진다. 신천 유역의 형상은 동·서·남부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반면에 북쪽은 트여 일종의 말발굽형이다.



#2. 대구 시민의 삶의 터전

신천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대구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고대부터 신천 물길 주변을 중심으로 사람이 정착하고 마을이 번성하며 도시가 발달했다. 특히 신천이 대구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여겨진 이유는 과거 대구부(大邱府)의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이었던 경상감영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1736년(영조 12) 경상감사 민응수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축성한 대구읍성은 지금의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읍성 내부에 대구부의 중심 기능을 했던 경상감영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대구 시가지를 관통하는 신천은 경상감영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이러한 이유로 주민들의 밀접한 생활공간으로 자리잡게 됐다.

지금도 신천은 대구시민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신천은 이미 ‘도심의 소박한 축복’이나 다름없다. 산책로와 곳곳의 소공원은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봄이면 수생 식물이 싹을 틔우고 이름도 생소한 철새들이 둥지를 튼다. 둔치의 버드나무는 한여름날 빛 속에 날아다니는 먼지처럼 하늘거린다. 가을과 겨울에도 신천은 저마다의 옷을 입고 유유히 흐른다. 시민들의 생활공간이면서 휴식처이자 주요 생태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신천을 대구의 젖줄로 부르는 이유다.



#3. 신천 물길의 오해와 진실

시민들의 터전인 신천의 물길은 변함이 없다. 밤티재에서 발원해 금호강과 합류하기까지 27㎞의 물길은 청동기 시대 이래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하지만 신천 물길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한자에서 나타나는 신천(新川)의 어원 때문이었다. 최근까지도 ‘1778년 대구판관 이서가 대구부 서쪽으로 흐르던 물길을 돌려 새로 만든 하천이라는 뜻으로 신천이라 불렀다’는 ‘오해’가 ‘진실’처럼 알려져 있었다. 한자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일견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 고증한 결과 이는 사실과 달랐다.

신천 물길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온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팔도여지지도(16세기 후기)와 광여도(1698~1703년)는 이서가 물줄기를 돌렸다는 1778년 이전에 제작된 지도인데, 이 지도에 나타나는 신천의 물길은 지금과 동일하다. 지도만 보더라도 이서가 물길을 돌렸다는 것은 역사적 오류다. 또 1778년 이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1425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의 대구편에 이미 신천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또 “신천이라는 용어가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경기도 양주시와 서울 송파구 잠실역 주변에도 신천이라고 불리는 하천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샛강’의 의미를 가진다. ‘새로 만든 천’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구의 신천 역시 대구부와 대구부의 속현인 수성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사이천’ 또는 ‘새천(샛강)’의 뜻이었는데, 과거에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신천’으로 오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대구시가 <사>한국지역지리학회에 의뢰한 ‘신천과 소하천 유로(流路) 변천 조사’ 연구용역 결과 ‘신천의 물길은 청동기시대 이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현재와 유사한 방향으로 흘렀다’고 결론지었다. 연구용역에서는 ‘신천에 분포됐을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의 위치 역시 지금의 물길을 따라 자리하고 있어 신천 물길은 지금과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신천이 대구판관 이서가 물길을 돌려 만든 새로운 하천’이라는 오해는 이제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서가 ‘신천이 범람해 홍수 피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은 ‘여전히 진실’이다. 전문가들도 이서의 이러한 행적은 ‘대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예부터 신천은 장마철만 되면 자주 범람해 주변의 논밭은 물론 대구읍성 안으로 물이 넘쳐 들었다. 당시 교동에 있던 향교의 사당까지 침수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1776년 이서가 대구판관으로 부임한다. 그는 해마다 홍수 피해를 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1778년 상동교에서 수성교까지 5리 구간에 제방을 쌓아 신천의 범람을 막았다. 제방을 쌓는 비용은 이서가 사재를 털어 부담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방을 ‘이공제(李公)’라 불렀다. ‘이공이 쌓은 제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해 8월 이공제비(李公碑)를 세웠지만 수해로 유실됐다. 이에 1797년 다시 비를 세우고 이서의 공적을 기렸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898년 다시 대홍수가 일어났다. 이때 이서가 쌓은 제방 일부가 무너져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당시 대구군수 이범선은 서둘러 보수공사에 나섰고, 특히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단시일에 공사를 완료했다. 그 같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다.

지금 신천이 지나는 대구 수성구 상동교 옆에는 ‘이서공원’이 들어서 있다. 공원 내에는 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비각 안에 3기의 비가 있는데, 왼쪽 2기는 대구판관 이서를 기리는‘이공제비’다. 2기의 이공제비 전면에는 한자로 크게 ‘이공제’라고 새겨져 있다. 맨 왼쪽의 이공제비는 1797년(정조 21)에 세운 비석이다. 오른쪽 비석은 1808년(순조 8)에 세운 것으로, 이 비석은 1986년 신천대로 확장공사 당시 수성교 서쪽 지하에서 발견돼 지금의 자리에 서있다. 1808년 세운 두 번째 비석은 1797년 세운 비가 초라해 이서의 업적을 영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1808년 세워진 비석의 글자를 당시 12세였던 이학철(李鶴喆)이 썼다는 점이다. 2기의 이공제비 옆에 서있는 나머지 1기는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전영권 대구가톨릭대 교수
참고=전영권의 논문
‘대구 신천 유로에 관한 새로운 해석’
김종욱의 저서 ‘대구 이야기’
공동 기획: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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