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유전자 품은 LP맨의 선곡…음악과 이야기로 고독 치유, 술은 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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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9   |  발행일 2019-04-19 제34면   |  수정 2019-04-19
[이춘호기자의 대구 LP 로드] 수성못 ‘스쿨’ 권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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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신촌블루스 리더싱어였고 영화 ‘노랑머리’ 주연배우로 활동한 블루스 뮤지션 김형철이 오픈했던 LP라이브카페를 2002년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권용한 사장.


스쿨은 1999년에 탄생했다. 그 스쿨이 권용한을 만나기까지 3년 정도의 오밀조밀한 틈이 존재한다. 그는 2대 사장이다. 그런데 초대 사장이 정말 물건이다. 바로 김형철이다. 그가 누군가. 영화 ‘노랑머리’ 주연배우, 엄인호 사단이 이끄는 신촌블루스 리더보컬, 그리고 지금 들어도 솔(soul)과 블루스 파워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작곡 ‘니노에서’를 남긴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었다. 매일 술만 마셨던 그의 몸은 김현식처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도 김현식처럼 2007년 4월2일 간암으로 영남대병원에서 타계했다. 실제 김현식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을 찍을 때 김형철이 주연배우를 했다.

기자도 영신고를 나와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다녔던 그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막막한 심사를 갖고 대구로 귀향했을 무렵 그와 인사를 나눴다. 대구MBC FM 골든디스크 장수 DJ인 이대희가 그를 소개해주었다. 이미 서울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몰고온 힙합, 그리고 아이돌스타의 가볍고 현란한 댄스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솔직히 블루스를 앞세운 그의 음악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가 재기를 위해 오픈한 뮤직 스페이스가 바로 스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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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의 인기 메뉴는 보드카 앱솔루트에 알맞은 모둠 돈가스 세트. 샐러리, 과일 등을 잘 섞어 꽃다발처럼 돈가스 옆에 매칭시켜 텁텁한 입맛을 깔끔하게 지워준다.


대구 라이브음악계
팔공산에 핀 통기타카페 ‘시인과 농부’
도심엔 달서구 솟대마을·새들의 고향
변두리·근교 길목마다 불지피며 ‘붐’

신촌블루스 보컬 김형철이 초대 사장
LP 외골수 마니아 권용한 사장 인수
단체 손님 대세, 신청곡 경쟁도 치열
16명이 앉을 수 있는 ‘ㄷ자 바텐’ 자랑
2층 계단 삐걱거림, 술맛 돋는 추임새
20∼60代 공존…온라인 선곡도 가능

샐러드와 과일 섞어 낸 ‘모둠 돈가스’
밤 10시부터 3시간 동안 ‘피크 타임’


◆스쿨과 맞물린 대구라이브 지형도

스쿨이 등장하던 무렵 대구 라이브음악계의 지형을 좀 들여다 보자. 가장 강력한 라이브태풍 하나가 팔공산 송림사 옆 농막 같은 통기타 라이브카페 ‘시인과 농부’에서 피어오른다. IMF 외환위기 때 생기 잃은 사람들한테 엄청난 인기를 얻는다. 학사주점 같은 분위기, 거기에 통기타라이브와 수제비. 그게 먹혀들었다. 수많은 카피본이 생겨난다. 팔공산 순환도로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도로변은 거의 묻지마 라이브카페로 도배됐다.

도심도 뜨겁게 달궈냈다. 달서구에서는 솟대마을, 새들의 고향 등이 불을 지폈다. 변두리는 물론 대구 근교 길목마다 통나무 라이브카페가 붐을 일으킨다. 그 흐름과 맞물려 수성못 바로 동쪽, 현재 파스쿠치 맞은편에서 추억의 7080밴드 신드롬의 맹아가 피어난다. 바로 ‘OB캠프’였다. 색소포니스트 김일수가 1997년에 오픈했다. 7080이란 말도 등장하기 전이었다. 김일수는 같은 색소포니스트 김상직, 그리고 당시 KBS 대구방송총국 아나운서 김충진 등과 합세했다. 스탠더드팝과 재즈를 라이브로 풀어냈다. 생음악에 목말라하던 시인묵객이 거기로 몰려갔다. 김일수는 3년 뒤 그 자리를 떠나 불교한방병원 근처에서 같은 콘셉트로 ‘스카이박스’를 차렸다. 이때 경북고 출신 뮤지션 정신욱이 ‘올드 팝스’를 터트린다. 올드팝스가 대박을 치면서 왕년에 나이트클럽에서 밴드생활을 좀 했던 사람은 연이어 생기는 밴드라이브무대로 달려갔다. 이때 김충진은 독자적 라인을 구사한다. 2005년 OB캠프를 두산오거리 지하 공간으로 옮겨왔다가 2년전 두산오거리 모퉁이로 이전했다. 초창기 OB캠프 자리는 이제 베이커리커피숍 WOO’s로 변해 있다. 김일수는 현재 가수 강소연이 차린 스쿨 근처에 있는 ‘예술’이란 무대에서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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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하기 전 입원한 병원 침대에서 기타연습 중인 뮤지션 김형철.

◆권용한의 지난 LP시절

권용한은 친구 사이가 된 김형철에게 제안을 했다. 천고가 높은 복층구조의 스쿨이 너무 좋아보이니 자기가 경영해보고 싶다고. 가게 영업이 별로라서 김형철도 마다할 처지가 못됐다. 김형철은 정말 직설적이었다. 손님이 ABBA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면 ‘우린 그런 노래 안 튼다’면서 면박을 줘서 쫓아보낼 정도였다. 그래서 몇몇 단골과 싸우다가 다쳐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는 그가 틀고 싶은 음악만 틀었다. 그러니 영업은 고만고만해질 수밖에. 권용한은 폼은 나지만 조금씩 손님과 멀어지고 있는 스쿨을 살려낸다.

계성고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 록밴드를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일주일치 용돈을 모아 한일레코드 등 시내 유명 레코드가게를 찾아 찜해 둔 빽판을 샀다. 당시 반월당 관음사 맞은편에 있었던 ‘우드맥’은 한강 이남에서 음악 좀 한다는 이에겐 성지로 불렸다. 교동시장 마지막 레코드가게로 불리는 ‘대지레코드’ 직원이었던 김범도 사장은 서울은 물론 일본 등을 통해 따끈따끈한 명반을 대구로 몰고와서 마니아를 열광케 했다. 권용한은 누구나 좋아했던 록보다 한발 더 나가 더 절제된 제3세계뮤직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잠시 언론사에서도 몸을 담았지만 결국 LP 사랑을 버릴 수가 없었다. 수성대 근처에서 ‘JAZZ IN’을 오픈했다. 인터넷이 안되는 시절이라서 음악감상은 음반에 의존해야만 하던 때였다. 마일스 데이비스, 찰리 파커, 빌 에반스 등 흥청망청한 곡보다는 쿨 재즈를 단골에게 선사했다. 그러던 중 영화 ‘접속’이 대박나자 연일 주제곡인 사라본의 ‘A Lover’s Concerto’를 틀기도 했다. 4년간 지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즐기는 것과 돈이 된다는 게 별개라는 사실을.

진짜 음악 마니아는 그렇게 소비적이지 않다. 그들은 안주도 요란하게 시키지 않는다. 그냥 병째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아낀 돈을 좋아하는 음반과 음향기기에 투자한다. 하지만 겉멋 든 단골은 매상을 잘 올려준다.

다시 수성구 시지 아파트촌 심장부로 건너가‘ IN MY MEMORY’를 차린다. 재즈 못지않게 우리 가요의 골든타임을 제대로 노출시킬 수 있었다. 신중현, 김정미, 김민기, 송창식, 김의철, 방의경, 정미조…. 요즘은 재즈보컬로 유명한 강허달님, 그리고 한국형 팝송의 신지평을 알려준 인디안수니와 박강수 등도 터치하게 됐다.

젊었을 때는 그도 김형철 못지않게 한 고집이 있었다. 김광석, 이문세까지도 촌스러워 품지 못했다. 그는 그게 자존감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곡을 듣고 싶다는 그 절절한 욕망을 과연 주인이 묵살해도 좋은가. 이젠 가능하면 손님의 편이 되어주려고 한다. 그때는 단연코 ‘NO’했던 김광석과 이문세도 5년 전부터 틀어주고 있다.

옆길로 빠지지 않았다. 오직 LP 외길을 그려냈다. 다시 중구 대봉동에서 ‘스토리빌’을 품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그 해에 스쿨을 인수하게 된다. 그는 속으로 ‘난 정말 외골수 LP마니아’라면서 스스로를 다독거려준다. 맞다. 그가 고깃집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다면 잘 어울릴까.

◆스쿨만의 문화

재즈바는 혼자 오는 단골이 많지만 요즘은 단체가 대세다. 신청곡 경쟁도 치열하다. 한 곡 신청하면서 홀 직원에게 팁을 주는 광경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인터넷과 연동돼 있어 판으로 틀 수 없으면 온라인을 통해 곡을 찾아준다.

김형철 시절에는 입구 오른쪽에 메인 바텐이 있었다. 지금은 맞은편으로 건너갔다. 모두 16명이 앉을 수 있는 ㄷ자 바텐은 이 집만의 자랑. 특히 원목의 질감이 압도한다. 여성의 앞가슴처럼 훤히 드러나보이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두툼한 원목으로 깔려 있다. 20년의 때가 묻어 있다. 나무도 말을 걸어온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의 속마음이 손님 발자국소리에 묻어난다. 1층 마루 바닥의 틈은 단골의 소지품을 집어먹는 ‘블랙홀’이다. 동전, 반지, 신용카드 등 별별걸 다 빠트린다.

스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잡음이 아니다. 술맛을 돋우는 하나의 ‘추임새’로 작동한다. 2층에서 1층 바텐을 바라보면 음반을 고르는 권용한의 어깨선이 그대로 노출된다. 바텐에서 위로 피어오르는 이야기소리는 2층 술꾼의 음악감상력을 더욱 보강시켜준다. 옆 자리의 포스가 자기 자리의 포스로 정착된다. 그래서 스쿨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스쿨의 음량은 세월따라 더 스트롱해지고 있다. 얼마전 갑자기 퀸을 소재로한 영화의 제목이자 삽입곡인 ‘보헤미안랩소디’가 연일 신청곡 1순위에 등극했다. 그렇게 복잡한 음계를 가진 보헤미안랩소디까지 단골들은 동요처럼 흥얼거린다. 스마트폰세상이라서 그런가. 영화와 드라마 속 삽입곡을 듣고 싶어하는 손님이 늘어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 OST ‘위올라이 (We all lie)’를 듣고 싶어하는 이도 많다. 영화 ‘마약왕’에 등장하는 추억의 팝송인 ‘스카이하이’까지 한몫한다.

스쿨은 20~60대가 공존한다. 스쿨이란 상호가 한몫한 것 같다. 음악과 이종교배의 세월을 보낸 주인의 유쾌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캐릭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 직원들은 검정 빵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힙합뮤지션처럼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다. 정면에 실전구가 박혀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 리스가 부착돼 있다. 음반코너 중앙에 딱 한 장만 재킷 앞면이 보이게 해놓았다. 팝아트 창시자 앤디 워홀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반 재킷에 그려준 바나나가 자꾸 눈길을 빼앗는다. 김광석 추모일에는 김광석 음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빙 크로스비 같은 캐럴 관련 뮤지션을 세워둔다.

그동안 음주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초창기에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마구 달리는 주당이 많았다. 이제는 음악과 이야기가 더 우선이다. 술은 그냥 덤이란 식이다. 예전에는 비 오는 날에 손님이 많았는데 요즘은 화창한 날에 더 필을 받는다. 2~3월은 비수기. 하지만 삼복과 휴가철은 옆에 수성못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곳과 달리 북적댄다. 스쿨은 스페인의 술로 등극한 보드카 앱솔루트 공급기지 같다. 이걸 먹는 단골이 절대다수다. 안주 포함 1병에 12만원. 맥주로는 기네스, 호가든, 하이네켄, 클라우드, 스텔라 등이 깔린다.

◆스쿨의 모둠 돈가스

안주는 ‘모둠 돈가스’가 저력이 있다. 기름에 튀긴 음식을 먹을 때 다가서는 특유의 텁텁함을 지워내기 위해 한쪽에 샐러드, 과일 등을 섞어 화환처럼 담아낸다.

오후 7시에 문을 열고 다음날 오전 3시에 문을 닫는다. 피크는 밤 10시부터 3시간. 아직도 기분파가 이 집을 살려낸다. 칠곡 등지에서 술을 먹다가 자신을 사로잡는 어떤 곡을 LP로 듣기 위해 대리운전해 여기까지 온다.

단골의 신청곡 사랑은 유별나다. 4명이 와서 10곡을 시킬 때 특정곡을 안 틀어주면 신청자는 단번에 토라진다. 아직 그런 대목이 힘들다. 이젠 단골의 18번은 알아서 챙겨준다. 그래야 이 업을 할 수 있다. 단골 중 유달리 의사가 많다. 특히 정신과 의사. 김형철과 친구 사이인 북구 삼성병원 박신병 원장도 LP광으로 초창기 여기에 살다시피 했다. 지금 들어도 음악성이 느껴지는 김형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니노에서’. 세월이 하 수상해 블루지한 표정으로 온 단골에겐 꼭 이 곡을 턴테이블에 올린다. 수성구 수성못 2길 42. (053)764-1969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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