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산 위의 저 기림비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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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30   |  발행일 2019-08-30 제21면   |  수정 2020-09-08
20190830
사윤수 시인

한 할머니가 자신의 손을 맞잡고 세 명의 소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다. 세 명의 소녀는 세상을 향해 당당한 눈빛으로 서로의 손을 의연하게 잡고 있다. 그 존재의 연대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끊을 수 없어 보인다. 한 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알린 고(故) 김학순 할머니이고, 세 명은 피해자 나라인 한국·중국·필리핀 소녀들이다.

이 기림비는 말한 바와 같이 의자에 혼자 앉아있는 기존 평화의 소녀상과는 다른 형상이다. 이러한 기림비가 남산에 세워지기까지는 많은 분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위안부 기림일 행사에 동행하면서 나는 알게 됐다.

위안부 기림비는 재미 한인교포들과 피해자의 각국 후원자들이 2017년 샌프란시스코에 맨 먼저 세웠다. 그리고 두번째 작품을 남산에 세웠다. 하여 더욱 특별한 기림일을 앞두고 기림비 제작을 주최한 분들이 두루 입국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도 알리기’와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앞장서고 있는 ‘김진덕 정경식 재단’의 김한일 대표와 그의 누나인 김순란 이사장, 미국 연방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결의안을 통과시킨 가장 큰 공로자 전 하원의원 마이크 혼다씨, 30년 넘게 지낸 판사직을 그만두고 중국의 위안부 문제 해결에 뛰어들어 인권단체 ‘위안부 정의연대’ 공동 의장을 맡고 있는 릴리언 싱과 줄리 텡 여사(이 두 분은 70세가 넘었다), 그리고 기림비를 제작한 조각가 스티브 와이트씨와 그의 아들이 차례로 도착했다. 우리는 이들과 이틀 동안 동행했다.

김 대표는 2015년 샌프란시스코시의회 청문회 증언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처음 만나 감동을 받았고, 재미 13개국 정의연대와 더불어 피해국가 북한을 포함한 13곳에 기림비를 모두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기림비 하나를 제작하는 과정부터 수송까지 엄청난 비용을 주최측에서 모두 부담한다. 또 중요한 것은 기림비를 세울 현지의 허가를 받고 일본의 방해와 견제를 피하는 일이었다. 이번 남산 기림비 건립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울시 관계자와 EBS 방송국 관계자 분들이 극비리에 진행했다고 한다. 모두 뜻을 함께 했기에 성공적인 건립이 가능했다.

다음 날은 함께 임진각을 둘러보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의 집인 ‘나눔의 집’에 갔다. 팔순을 앞둔 마이크 혼다씨는 이번이 여섯 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혼다씨가 다시 만난 할머니들을 따뜻하게 포옹했고, 김 대표는 할머니들께 선물을 나눠드렸다. 기림비 기증만으로도 더없이 감사한데 세세한 선물까지 챙겨온 그들의 모습이 정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었다.

기림비를 세운 남산 조선신궁 터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탈하고 지배한 상징적인 장소다. 이제 이 곳은 잔인했던 일본군의 위안부 성폭력 피해를 역사에 남기며 단죄해야 할 새로운 상징의 장소로 바뀌었다. 이곳엔 백범 김구 선생·안중근 의사 동상이 있다. 이분들의 영혼이 이 나라를 수호하고, 우리는 아베 총리가 이곳에 와서 사죄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 동상 저고리에는 자그맣게 독도가 새겨져 있다. 발밑에는 고난의 길을 상징하는 자갈이 깔려있고 세 명의 소녀들 발 밑에는 흙이 깔려있다.

제작자 스티브 와이트씨는 “그 당시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소녀들의 키도 고증을 통해 당시의 평균 키인 160㎝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 명의 소녀 사이에는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 누구라도 그 사이에 같이 서서 소녀와 손잡을 수 있고 함께 인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힘껏 외칠 수 있다.사윤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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