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호성의 사주 사랑(舍廊)]- 나는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 김기오
  • |
  • 입력 2020-03-11 22:29  |  수정 2020-03-2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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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아무개는 중학교 때 공부를 내보다 못했는데…”
중학생 때 열등생으로 치부됐던 김 아무개가 일류대학을 가고 사회적 성공을 하자 그 친구가 하는 말이다.
“지금 이 아무개는 일류화가 대접을 받고 있지. 그런데 사실 고등학교 땐 동기인 박 아무개가 이 아무개보다 그림을 훨씬 잘 그렸는데 무명화가로 머물러 있지.”
미술학도였던 이 아무개와 박 아무개의 고교 시절 실력 순위와 졸업 20년 후의 실력 순위가 뒤바뀌어 인생역전이 된 것을 보고 그들 친구가 하는 말이다.

1960년대 중반 A와 B는 고교 동기이자 시인을 꿈꾸던 같은 문학도였다. 둘은 고3학년 때 다른 한 명과 함께 셋이서 3인 시집 ‘꽃의 언어’를 내는 기염을 토하였다. 문학열에 불탄 고교생 3명이 시집을 내는 일이 당시로선 큰 사건이었다. 서로 내가 네보다 시를 잘 쓴다고 우기며 우쭐대던 둘은 장차 위대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안은 채 고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누가 더 유명한 시인이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A가 B보다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A는 유명세를 톡톡히 누리고 한 세상을 살았으나, B는 시는 썼으되 시인 대접을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았다. A는 정해년 계축월 기해일 갑자시 생이고 B는 정해년 기유월 신축일 신묘시 생이다. 둘 다 문학소질은 타고났으되 A는 성공하고 B는 성공하지 못한 그들의 문운(文運)을 추적해보자.

문학도들은 대개 20대에 등단을 한다. 가슴이 뜨겁고 열정이 솟고 의욕이 왕성한 시기가 20대이기에 그렇다. A와 B는 어땠을까? A는 28세이던 1974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20대 등단이긴 하지만 서른을 앞둔 나이이니 늦깎이였다. 반면 B는 20대 등단의 공식을 밟지 못했다. 30대 중반까지도 신문문예에 도전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곤 등단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A는 꿈을 이루고 B는 꿈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뭘까. A는 문학도들이 거의 그러하듯 대학 국문학과에 진학해서 문학공부를 계속하였다. 시를 껴안고 살았다. B도 문학도들이 가는 길로 가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보다 밥이 중요했다. 생업에 몰두했다. 자연히 시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환경에 따라 둘의 문학인생은 달라졌다.

B가 20대 등단의 꿈을 이루지 못한 원인에는 직업환경에 얽매인 나머지 기회를 잡지 못한 자기 책임도 작용한다. 때가 왔는데도, 운이 왔는데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한 실기(失機)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 명리를 모르니 때가 오고 운이 오는 줄을 어찌 알았으랴. 그에게는 21세부터 23세까지 문운이 아름답게 오고 있었다. 이때 밤새워 시를 읽고 시를 썼더라면 A보다 먼저 등단할 수도 있었으리라. 혹은 26세와 27세 때 시작에 몰입했으면 등단했으리라. 물론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때를 알았다면 노력을 했으리라.

A는 등단 이후 문단에 이름을 별로 알리지 못했다. 그런데 40세 때인 1986년(丙子년)에 인생역전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가 방송을 타고 전국을 휩쓸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노래를 즐겨 불렀다. 서서히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문단에도 존재감을 알려졌다. 일반사람들이 A시인의 이름을 대면 누군지 몰라도, 무슨 노래의 가사를 지은 시인이라고 하면 아, 그래요 하고 반가워했다.

A가 40세 때 맞이한 운은 아름다운 인성(印星) 운이다. 인성이 아름답게 오면 천우신조가 일어난다. 귀인의 도움이 생긴다. 인복이 나타난다. 뜻밖의 행운을 얻는다. 내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그의 귀인은 가수였다. 1985년 혼성듀엣이 제9회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는다. 대상을 받은 노래의 가사가 바로 A의 시였다. 당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때여서 이 혼성듀엣은 그 노래의 가사를 자기가 쓴 것으로 발표했다.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하는 사이 A도 이 혼성듀엣이 자기의 시를 표절한 걸로 인지하였다. 표절문제로 약간 시끄러웠으나 결국 이 노래의 작사자는 A라고 바로잡아지고 이 노래의 인기와 함께 A의 인기가 지명도도 높아졌다.

이 40세를 기점으로 해서 A는 지인이 도와주는 행운(劫財행운)을 10년 동안 얻어서 직장생활을 잘하였고, 54세부터 20년 동안은 아름다운 인성 운을 맞이 시를 열심히 쓰고, 시집도 많이 내고, 문학단체의 장도 지냈다. 인성은 귀인 코드이기도 하지만 학문 예술 코드이기도 하므로 시작 활동과 시집 출간을 활발히 한 것이다. A가 유명한 시인이 된 배경에는 행운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편 실기한 B는 등단의 꿈은 접었으나 시인의 꿈은 접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업무에 시달리면서 틈틈이 시를 썼다. 대운(10년 단위의 운)으로 보면 그는 24세부터 30년 동안은 직장과 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운으로서 시를 만지작거릴 수 없는 때였으니 작품을 제대로 쓰질 못했다. 뒤늦은 54세부터 20년 동안 재능이 발휘되는 운(아름다운 食傷 운)을 맞이하여 시작을 왕성히 하고 시집을 낼 준비도 했다. 하지만 끝내 시집도 못 낸 채 무관시인으로 67세에 졸하였다.

B는 시는 썼으되 등단을 하지 않았고 시집 출간도 하지 않았으므로 문단에서는 시인으로서 대접받지 못했다. 그가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등단할 기회는 많았음에도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잡다하게, 어지럽게, 상업적으로 열린 등단의 길로 가기를 거부했다. 인간적 자존심과 시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이름 석자 앞에 시인이란 이름을 달지 못한 무관(無官)시인으로 살았다. 무관시인의 배경에는 흉운과 본인의 캐릭터가 작용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능력을 타고난다. “사람이 그 능력을 발휘해서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본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명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다. 명리가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그 능력을 발휘해서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본인의 노력 밖의 환경과 운에도 달려 있다.” 아무리 예술가의 소질을 타고났어도 환경과 운이 받쳐주지 않으면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

이제 밝힌다. A는 높은음자리의 유명한 노래 ‘바다에 누워’의 작사가이자 시인인 박해수이다. 5년 전 71세에 졸하였다.

 

이 대목에서, 환경에 따라 타고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우호성<△언론인(전 경향신문 영남본부장)△소설가△명리가(아이러브사주www.ilovesajoo.com 운영. 사주칼럼집 ‘명리로 풀다’출간)△전화: 010-380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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