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명 소설가가 말하는 父 구상 시인의 '대구 시절'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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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3 09:09  |  수정 2020-07-03 10:44
"여리고 가난했던 예술가 보듬어…'거식·몽상의 난민' 화가 이중섭도 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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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쯤 구상 시인과 부인 서영옥 여사, 딸 자명씨. 구상 시인은 1953년 대구에서 가까운 칠곡 왜관에 정착했고, 그의 부인은 '순심의원'을 운영했다. 〈대구문학관 제공〉
"아버지 인생에서 대구에서의 시간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문학의 중심부인 대구를 거닐며, 향촌동에서 피란 온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했습니다."

1950년대 대구와 향촌동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던 구상 시인의 고명딸 구자명 소설가가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구 시인의 '대구 시절'을 이렇게 설명했다.

구상 시인은 6·25전쟁 때 대구에 왔으며, 1·4후퇴를 전후해 영남일보에 집무실을 두고 일하기도 했다.

1953년엔 구상 시인의 부인이 대구와 가까운 칠곡에 병원(순심의원)을 개업했다. 구상 시인은 당시 가난하고 여린 대구의 예술가들을 보듬었다. 휴전 후 대구에 와있던 '거식과 몽상의 난민' 화가 이중섭을 돌본 것도 그였다.

"왜관에 살림집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구에 자주 드나드시며 문학활동을 이어갔고, 향촌동에서 문인·음악가·무용인·화가 등 여러 예술가와 소통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구 향촌동은 구상 시인을 비롯해 많은 예술인이 모여 예술의 열정을 꽃피우던 공간이었습니다."

구상 시인의 대구 시절이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구 소설가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구상 시인의 작품세계를 묘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6·25전쟁 중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대구에서 영남일보 주필 등 언론계 요직에 있으면서 전후 현실의 참상과 정치·사회적 혼란을 진저리나게 보고 겪었을 그가 단순한 서정미학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구자명 에세이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 중)

그러나 전쟁의 광기와 시대적 혼란 앞에서도 대구 향촌동에서는 애처로운 낭만이 피어올랐다.

"대구 향촌동은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아버지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문학인에게 그런 시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그 당시의 경험과 추억, 영감(靈感)들이 구상 시인의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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