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2부-대구의 문화예술] (2) 피란문단 향촌동에서 꽃피다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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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2 07:49  |  수정 2021-06-28 14:22  |  발행일 2020-07-02 제18면
향촌동은 '영감의 원천'…총 대신 펜 들고 戰線문학 꽃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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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대구 상록수다방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조지훈 시인이 작품을 낭독하고 있다(왼쪽). 조지훈이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라는 제목으로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을 실었다. 〈대구문학관 제공·영남일보 DB〉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내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를 가더라도 그 추억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간다네." 프랑스 파리에서 한때를 보낸 헤밍웨이가 한말이다. 파리에서의 몇 년은 헤밍웨이에게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았다. 예술가들에게 어떤 특별한 순간은 영원히 각인된다. 구상 시인이 노래한 바로 그 '영원' 말이다. 6·25전쟁기 대구에 피란 온 문인들은 향촌동 등지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전쟁통에도 펜을 놓지 않았다. 불안과 낭만이 공존하던 1950년대, 대구와 향촌동에서의 몇 년은 당시의 문인들과 우리 문학사에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으로 남았다.

문인들 다방 모여 출판기념회
대구 출판문화 융성한 계기로
서문로 영남일보 사랑방 역할


◆'문학의 씨앗'을 심은 이들

대구라는 토양에 문학의 씨앗을 심은 이들이 있었기에 1950년대 대구의 피란문단은 비로소 만개할 수 있었다. 대구 문학 여명기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이상화를 비롯해 현진건, 백기만, 이장희, 이육사, 백신애 등이 그들이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명시를 남기고 1943년 계산동 고택에서 영면에 든다. 역시 대구 출생으로 '운수 좋은 날'을 쓴 빙허 현진건은 상화와 같은 해 같은 날 세상을 떠난다. 1900년 대구 부호 이병학의 아들로 태어난 고월 이장희도 '봄은 고양이로다' 등의 시를 남기고 서른 언저리에 이른 생을 마감한다. 1904년 안동에서 난 이육사는 청년기에 대구를 근거로 활동을 하면서 문인과 항일투쟁가의 삶을 살았다. 1908년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에서 수학한 여류 소설가 백신애도 있다. 백신애는 시베리아 체험을 토대로 한 '꺼래이'를 비롯해 '적빈' 등의 작품을 남기고 1939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한국 근대문학의 여명기를 밝힌 대구경북 문인 상당수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들이 남긴 문학 정신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대구 문학을 꽃피우는 매개가 됐다.

대구 문학의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죽순'이다. '죽순'은 1946년 5월1일자로 대구에서 이윤수가 주축이 돼 발간한 시 문학 동인지로, 광복 후 대구 문단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목월, 이영도, 유치환, 이호우, 김동사, 이응창, 조지훈, 박두진, 유치진, 천상병, 김춘수, 신동집, 김요섭 등 걸출한 문인들의 작품이 죽순에 수록됐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다

문학은 필연적으로 시대 상황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걸까. 특히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을 문인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6·25전쟁 초·중반 대구 문단의 한 특징은 '전선문학'이다. 문인들은 총 대신 펜을 들고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당시 전선문학의 중심이 바로 대구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수도인 대전에서 종군문인단인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가 결성된다. 조지훈, 김광섭, 서정주, 김송, 박목월, 조영암, 박연희, 이한직, 박노석, 박화목, 조흔파, 구상 등이 참여했다. 이어 대구에선 '문총구국대 경북지대'가 발족된다. 문총 경북지대는 이효상, 이윤수, 김사엽, 김진태, 백락종, 유기영, 김동사, 신동집, 이호우 등으로 구성됐다.

전세가 악화되자 대전에 있던 문총구국대 본부가 피란길에 나서 대구에 오게 되고, 문총 경북지대 문인들과 합류해 전쟁을 기록하는 작품을 남기게 된다.

한때 해산했던 문총구국대는 1·4후퇴 이후 육·해·공군별로 종군작가(문인)단을 결성해 활동을 재개했고, 그 거점이 대구였다. 그 당시 대구시 중구 서문로에 있던 영남일보는 문인들의 사랑방이었고, 그들의 많은 작품이 신문에 실렸다.

문인들은 전쟁 중에도 작품을 쓰고 출판을 했다. 당시 향촌동 다방들에서는 문인들이 모여 출판기념회를 했다. 백록다방, 향수다방, 상록수다방, 모나미다방, 살으리다방, 아담다방 등 많은 다방에선 문인들의 출판기념회나 문화교류의 장이 열렸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도 향촌동의 꽃자리다방에서 열렸다. 문인들은 감나무집이나 석류나무집, 말대가리집 등에도 자주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예술을 논했다. 그리고 음악감상실에선 바흐와 드뷔시 등을 들으며 음악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향촌동이 문인들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전쟁은 대구에서 출판문화가 융성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국내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대구에 모여있으니 출판업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50년대 대구의 대표적인 출판사 중 한 곳이었던 청구출판사는 백기만의 '상화와 고월'(1951) 등을 출판했으며, 지금의 대구문학관 건너편에 자리해있던 출판사 '문성당'에서는 모윤숙의 '풍랑'(1951), 유치환의 '청마시집'(1954) 등을 펴냈다.

대구 북성로에 위치해 있던 '영웅출판사'는 김소운의 '목근통신'(1951), 박두진의 '오도'(1953) 등을 출판했다. 대구의 중견 출판사 '학이사'의 전신 '이상사'도 6·25전쟁 때 국내 대표 출판사들과 함께 대구에 피란 와 둥지를 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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