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로드] 경상도 국수열전 (2)추억의 국수공장…대구 장수국수 '풍국면' '소표'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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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3   |  발행일 2020-07-03 제34면   |  수정 2020-07-03
격랑 헤치고 쭉쭉 성장한 대구 장수국수 '풍국면' '소표'…입맛 사로잡은 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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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처럼 풍족한 국수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 덕분이다. 1956년부터 25년간 밀가루를 제공 받는다. 1946년부터 79년까지 한국에 146억810만달러어치를 원조했다.


1950년대 대구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인근은 지금의 동성로를 능가할 정도의 노른자위 땅이었다. 고도의 자본이 집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구를 주름잡는 정미소를 겸한 제분공장 6인방이 출현한다. 도정과 제분을 동시에 주무르는 대동제분(내당동)·경상제분(침산동)·춘천·대동·풍국·옥화정미소다. 대동제분은 64년 대신동 1453에 5층짜리 제분공장을 짓는다. 당시 대구에선 빌딩급으로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지금 그 자리는 패션디자이너 최복호가 '문화공장'이란 문화카페로 리모델링 했다. 현재 대구 담수회장을 맡고 있는 대동제분의 창업주인 박연탁(77). 그가 60년대까지 건재하던 굵직한 제분공장들이 왜 80년대 초 통폐합돼 사라졌는지 그 속사정을 알려줬다.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통폐합하듯 전국에 15개가량 있던 제분공장을 8개 정도로 줄이게 된다. 내륙에 입지한 자잘한 제분공장은 대한제분·동아제분 등 매머드 공장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분석돼 산업합리화 차원에서 정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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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국면
60년대 자동화 시스템…공격적 사업
대구 첫 로컬라면 '아리랑' 개발 참패
대기업 독점에도 밀려 경영악화 시련
2세 경영인 나서 다양한 마케팅 회생


대동산업 바로 근처에 있는 풍국은 도정뿐만 아니라 제분공장, 심지어 제면사업까지 손을 댔다가 사업이 상당히 힘들게 된다. 현재 창업주 신재순의 손자 신흥섭이 가업을 잇고 있다. 풍국산업의 시설 일부가 떨어져 나가 지금의 북구 노원동 풍국면으로 태어나게 된다. 풍국면은 격랑을 헤쳐나와 소표와 함께 장수 국수 공장으로 기반을 잡게 된다.

풍국면의 전신은 1933년 3월18일 서구 내당동 현재 내당파출소 동편 마루요시(丸吉) 제분·제면 공장. 이때 시스템은 반자동이었다. 마루요시는 49년 제면·제분부, 정부양곡 도정부를 가진 대한압맥공업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이게 신재순에 의해 53년 풍국산업으로 자릴 잡는다.

풍국은 60년대 후반 제면부 공장을 따로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영남제분 노원동 공장 부지를 인수해 풍국면 자동화 시스템을 세팅하고 73년 6월4일 구자춘 경북도지사, 이규이 대구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풍국면 노원 공장 준공식을 갖는다. 풍국면이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풍국면이 새로운 국민 간식으로 부상한 라면의 강자가 되기 위해 사업을 공격적으로 전개한다. 69년 3월5일 대구 첫 로컬 라면인 '아리랑'을 개발하지만 참패 당한다. 설상가상 정부는 지역 기업을 살리기 위해 지역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원가를 반영한 정부 가격인 '고시 가격제'를 78년 전격 해제한다. 대기업이 농림부에 로비를 한 것이다. 제분 영업권을 농림부에 반납한 풍국산업은 사업합리화 차원에서 제면부를 79년 7월1일 당시 서문시장 최대 쌀 도매상 주인 최정수한테 매각한다.

하지만 대기업 국수 때문에 경영악화를 걷던 풍국면, 한때 유능한 증권맨이었던 그의 아들 최익진이 구원투수로 등장한다. 그는 일반반죽에서 벗어나 진공반죽을 시도하고 이마트 납품, 다양한 OEM 마케팅 등에 힘입어 오뚜기 등 대기업이 독점한 국수시장에서 살아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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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표국수 대구 달성동 시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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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표국수의 효자상품으로 선물용으로 인기를 끈 '금실면'.

▶소표국수
침산동 방앗간-도정업-국수공장 신화
삼성상회 주력 상품 별표국수와 쌍벽
85년 출시 '금실면' 선물용 히트해 효자
미국산보다 매끈한 호주산 밀가루 적중

'소표국수'의 전설을 가진 대양제면 권호용(76) 사장을 만나러 성주로 떠났다. 1914년 태어난 선친 권팔수의 안동권씨 세거지는 북구 침산동 언저리. 그는 침산동 근처에서 방앗간을 시작했고 그걸 딛고 도정업자, 그리고 마지막엔 국수 공장으로 성공한다.

48년 삼성종합기계 1호 국수 기계가 3층짜리 침산공장에 들어온다. 사세가 커지자 60년 중구 달성동 8 옛 동아극장 바로 옆으로 본점을 옮긴다. 88년 침산과 달성공장이 통폐합되고 94년 성주로 공장이 이전된다.

소표 이전에는 '닭표'가 강자였다. 닭표는 서구 원대동 옛 부민극장 언저리인 가구골목에서 태어났는데 그 옆에 왕관국수도 있었다. 닭표는 삼성 이병철이 세운 별표국수와 인연이 깊다. 38년 3월1일 중구 인교동 61의 1(오토바이 골목 서북단)에서 지하 1층~지상 4층 크기의 '삼성상회'가 오픈된다. 이병철은 이곳에서 삼성그룹의 에너지원을 확보하게 된다. 별표는 강아지풀 대 굵기만 한 가는 건면을 뽑아냈고, 이걸 종이 띠로 어른 팔목 굵기(375g·3인분용)만 하게 포장해 상점과 식당에 팔았다. 삼성상회의 주력 상품은 별표국수. 하지만 이병철이 있을 땐 생각한 것만큼 장사가 안됐다. 별표국수를 성공적으로 키운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이병철의 동향(경남 의령)인 박윤갑이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이병철을 찾아간다. 사람 됨됨이를 간파한 이병철은 박윤갑에게 국수 공장을 맡기고 광복 직후 삼성물산을 서울에 구축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박윤갑은 그걸 야무지게 살린다. 거기서 서기 담당을 했던 곽남수도 훗날 독립해 닭표국수(상표 등록 57년)를 오픈한다. 하지만 그는 조선제분 대리점까지 경영하며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다가 부도를 낸다. 뒤이어 이문환이 부도난 닭표를 인수해 묶음 종이띠를 장당 1원에 받으며 상표권만 행사할 지경으로 닭표는 바닥을 치게 된다. 그 뒤를 노린 게 소표국수다.

권팔수는 48년 북구 침산동 1501에 '대양제면'을 세우고 대표 브랜드 소표국수를 출시한다. 소표는 국수 전문 공장으로선 별표국수와 쌍벽을 이룬다. 이 공장에서 나온 국수는 중간도매상 격인 칠성시장 내 '대남상회' 등에 납품됐다. 62년 선친이 작고하자 형 권호상과 그(권호용)가 함께 가업을 잇는다. 89년 형이 가업에서 손을 떼자 그가 회사를 도맡게 된다. 하지만 소표도 IMF 외환위기 때 좌초위기에 처한다. 그도 10년간 호주로 이민을 갔지만 가업이 눈에 아른거려 이를 악물고 귀국하게 된다.

권호용 사장이 묵직한 '면류협동조합 30년사'를 책장에서 끄집어내 보여준다. 그리고 57년 상공부 특허국이 감수, 산업경제사정연구소 발간 '상표연감'을 펼쳐 소표와 닭표 상표를 보여준다. 소표국수가 존속할 수 있었던 건 효자상품 '금실면' 덕분. 85년 첫 출시된 이 국수는 결혼식 답례품 등 선물용을 겨냥한 건데 적중한다. 2010년에는 '실라리안'이란 라벨을 붙이고 회사선물용 국수도 뽑았다.

대양제면은 현재 호주산 밀가루를 사용한다. 이유가 있다. 80년대 중후반 가정용 소면 돌풍을 일으킨 오뚜기가 진라면을 만들 때 부산 동아제분과 손을 잡고 호주산 밀가루 독점라인을 형성해 비약적 성장을 한다. 호주산 밀은 미국산보다 더 매끌매끌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도 그걸 확인하곤 곧장 호주산으로 수입라인을 변경한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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