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 이상화..."문학인은 삶을 기록하고 민족언어 지켜야" 시대의 감옥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친 항일시인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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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04 08:16  |  수정 2021-04-23 09:03  |  발행일 2021-01-04 제27면
60여편 작품 속 탁월한 감수성과 감각…오늘날 우리들 삶에도 그의 저항정신 깃들어
대구의 품격 높인 문화예술 선구자 그들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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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는 새해를 맞아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연재를 진행한다. 문학·미술·음악·영화·무용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며 대구 문화예술의 토대가 된 인물들을 기사를 통해 한 명씩 소개한다. 그 시절 대구 문화예술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대구라는 도시를 더욱 매력적이고 예술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즐거움이자 의무다.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첫 번째 순서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대구 출신의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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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와 형제들. 상화(앞줄 왼쪽)는 1901년 4월 대구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문학관·영남일보DB〉

◆대구서 태어나 대구에 잠들다

때로는 결기 어린 저항시로, 때로는 감각적인 낭만시로 국민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 이상화.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상화는 1901년 4월5일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상화'(尙火·想華)는 그의 호다. 상화의 맏형이 바로 독립운동가인 이상정 장군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 사람은 스스로 태어날 시대를 정할 수 없다지만, 하필이면 그 암담하고도 서글픈 시절을 살아야 했던 시인, 지식인의 삶은 어땠을까.

상화는 고뇌하고, 방황하고, 저항했다. 1923년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머물렀던 상화는 그해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상화는 '도쿄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 도회의 호사로운/ 거리에서/ 나는 안 잊히는 조선의 하늘이/ 그리워 애달픈 마음에 노래만/ 부르노라"라고 읊조린다.

1928년 6월 대구에서 한글의 첫 글자를 딴 이른바 'ㄱ당 사건'(신간회 출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차용·장택원 등이 달성군의 한 부호를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 터지게 되고, 이 사건에 연루된 상화는 당시 대구경찰서에 구금돼 고초를 겪는다. 그 시기 상화는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에는 많은 항일 인사들이 출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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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왼쪽) 시인이 중국에서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 함께 찍은 사진.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실루엣만 나오도록 찍어야 했다. 〈출처 정혜주 작가〉

1935년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갔다 귀국한 상화는 그 후로도 한 차례의 구금과 한 차례의 가택 수색을 당해야 했다.

그는 숙환으로 투병하던 중 1943년 4월25일 만 42세의 나이에 대구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한 채였다. 상화는 사망 두 달 전 친구 백기만에게 "집필하려던 국문학사를 탈고해놓고 죽었으면 했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라고 토로했다.

일제강점기라는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감옥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구절 속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처럼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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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고택.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기거한 곳이다. 노진실기자

◆상화의 작품, 그리고 상화의 흔적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누어져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누어져 생각하고 사느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이별을 하느니'의 한 구절이다. 이상화고택, 수성못에 세워진 시비를 통해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이다.

상화가 남긴 시는 시조를 합쳐 60여 편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성격을 시기별로 나눠보면 1922~1923년은 관능·낭만적, 1923~1926년은 경향파적, 1926년 이후는 저항적인 것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상화는 '개벽' 58호에서 자신의 문학관을 이야기한다. "인생의 삶은 충동의 연속이며 충동은 곧 생활 그 자체로서 그것을 기록해 가는 것이 시다."

윤장근(1933~2015) 소설가는 저서 '대구 문단 인물사'에서 상화의 시와 문학관에 대해 "문학인은 삶을 기록하기 위해 남다른 책임이 있어야 하고, 그 책임은 곧 민족 언어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 상화의 지론이었다. 또 시인이란 사상의 비판자이며 생활의 선구자이기에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상화의 문학관이 이러하기에 조국 상실을 비통해하는 민족시인으로서 자리 잡을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이상화 '시인에게' 중) 그렇게 상화는 마지막까지 조선의 땅과 말을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2020년 현재까지 대구 곳곳에 남은 시인의 흔적을 통해 그의 문학적 감수성과 탁월한 감각, 올곧은 저항정신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 상화의 기질은 현재를 살아가는 대구시민의 기질 어딘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하석 대구문학관장은 "상화는 역사적으로 험난하고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예술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한 시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두운 현실을 문학을 통해 드러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쳤다"며 "이 같은 그의 삶은 대구시민이 이상화 시인을 더욱 아끼는 이유가 됐다"고 말했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참고='대구 문단 인물사'(윤장근)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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