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 홍해성…대한민국 최초 근대극 연출가, 사실주의 도입

  • 박주희
  • |
  • 입력 2021-01-18 08:15  |  수정 2021-04-22 16:18  |  발행일 2021-01-18 제20면
"법학공부로 성공한다고 해도 동족 차별밖에 더하겠는가" 극작가 김우진의 권유로 연극인의 길
극예술연구회·동양극장 전속연출 활동…신파극식 낡은 연출 개혁하고 사실극·대중극 조화 일궈

2021011701000503200020072
홍해성이 연출한 작품. 〈제1회 홍해성연극상 시상식 팸플릿〉
2021011701000503200020071

홍해성(본명 홍주식·1894~1957)은 대구가 낳은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극 연출가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연출을 처음 도입해 서구 근대극 수용의 기틀을 잡았고, 신연극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싹 틔우기 위해 일생을 던진 국내 연극계의 큰 별이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도 연출가 역할을 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개 독자적인 연출가이기보다는 배우에다 극단 단장이나 기획·운영을 겸한 지도적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는 유명 배우가 중심이 되던 시기였다. 홍해성은 한국 연극사에서 1930년대 초 연출가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대한민국 근대극의 선구자이요 선각자이다.

◆법학도에서 연극 연출가로

애초 그는 법학도였다. 대구 덕산동 229번지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 대구 대남학교, 계성중을 다닌 그는 법관의 뜻을 품고 일본 쥬우오(中央)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유학시절 극작가 김우진을 만난 것이 계기가 돼 법학도에서 연극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홍해성의 제자인 고(故) 고설봉 배우의 증언에 따르면 홍해성과 절친했던 김우진이 "식민지 청년이 법학을 공부하면 성공한다고 해도 동족 차별밖에 더하겠는가. 자신은 극장 운영을 공부해 조선에 돌아가서 가산을 처분, 극장을 짓겠으니 그곳에서 활용할 연극 지식을 공부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렇게 홍해성은 일본대학 예술학과로 편입해 연극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김우진과 와세다대학 동창이자 일본 근대극 배우로 명성이 높았던 도모타의 도움으로 일본 근대극 최고 극단인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 입단한다. 축지소극장이 결성된 1924년 6월부터 극단이 분열된 1929년 3월까지 약 5년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연출과 연기 수업을 받으며 전속배우로 활약했다. 직접 출연한 작품이 초연만도 50여 편에 이르고, 재출연까지 합치면 80여 편에 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26년 절친 김우진이 현해탄에서 유명을 달리하면서 홍해성은 실의에 빠졌고, 두 사람이 조선에서 함께 이루려 했던 연극에 대한 꿈도 수포로 돌아갔다. 김우진이 살아있었다면 홍해성이 국내 연극계에서 미친 영향력과 입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근대극 발전 토대 '극예술연구회'

홍해성은 일본 축지소극장의 창설자이자 그의 연극 스승인 오사나이가 죽자 단원이 양분되면서 1930년 6월에 귀국한다. 그의 귀국 소식에 조선 문화계는 크게 환영했다. 그해 8월 동향(同鄕)의 시인 이상화의 지원을 받고 경성소극장 창단을 시도했으나 이상화의 출자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실패하기도 했다.

1930년대 전반기는 우리나라 연극시장에서 대중극이 널리 공연되던 시기였다. 대중극은 극본의 부족, 신파조 연기, 부실한 무대장치, 막간 여흥의 지나친 확대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홍해성은 종래 신파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연극의 필요성을 전제로 근대극 운동을 벌였다.

1931년 7월 결성돼 신극(사실극·연구극) 발전을 주도했던 '극예술연구회'(이하 극연)는 우리 연극사에 있어 진정한 의미의 근대극을 이룬 시발점이 된다.

극연은 1920년대 후반기 일본에서 유학했던 지식인들이 발족한 단체다. 홍해성을 비롯해 윤백남, 서항석, 김진섭, 이헌구, 이하윤, 장기제, 정인섭, 유치진, 조희순, 최정우, 함대훈 등 12명이 발기 회원이었다.

홍해성은 극연의 초기 연출을 전담했다. 극연에서 첫 연출한 작품인 고골리의 '검찰관'을 시작으로 어빙의 '관대한 애인', 그레고리 부인의 '옥문' 등 총 9편을 연출했다.

극연에서 홍해성의 연출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근대극 수립의 토대와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연출한 번역극은 일본 축지소극장 배우 시절에 직접 출연했던 작품이어서 모방과 재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도 있지만, 이는 신극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동양극장 전속 연출가로 자리 옮겨

홍해성은 1935년 11월 당시 조선 최고의 흥행극단인 동양극장이 설립되면서 연출부와 극장 지도자로 자리를 옮긴다.

동양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전속극단을 조직하고 배우 월급제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1943년 사임할 때까지 전속 극단인 청춘좌 등에서 총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그런데 극연의 활동을 주도했던 홍해성이 극연과 성격이 다른 동양극장으로 옮긴 까닭은 무엇일까.

권원순 홍해성 선생 기념사업회장·미술평론가는 홍해성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기념 세미나 주제발표에서 "이는 홍해성이 동양극장으로 옮겨가기 직전인 1935년 7월 조선일보에 '극장을 가지자'라는 기고글에서 답변의 단서를 짐작할 수 있다"면서 "동양극장의 영입 제의를 수락한 것은 생계 해결과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된 극장의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욕구가 맞물린 결과로 추측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동양극장의 연극은 홍해성이 연출을 담당하면서 흥행을 위해 상업성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나 신파극 식의 낡은 연출 스타일을 개혁하고 사실주의 연극 방법론을 도입해 대중극의 낭만주의와 조화시켰다.

그는 1943년 10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연출 활동을 중단한 채 칩거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광복 이후에도 연극계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서울 신촌에서 생활하며 서라벌 예대 강의와 학생 연극 지도에 힘썼다.

1957년 7월 국립극장 환도기념 공연인 칼 쇤헬의 '신앙과 고향' 연출을 끝으로 그해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별명은 시곗바늘, 무대의 호랑이

홍해성은 공연할 작품의 연출 대본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만들어 배우에게 언제나 그대로 연습하도록 지도했다. 화술과 동작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며, 개성을 잘 드러내는 분장법을 직접 지도하고 때로는 손수 해줘 당시 동양극장 배우들은 분장 실력이 매우 앞서 있었다고 한다.

1937년 극단 '청춘좌'에 입단했던 고(故) 고설봉 배우는 "홍해성의 별명은 시곗바늘, 무대의 호랑이였다.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낮 공연은 오후 1시, 밤 공연은 오후 7시로 개막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실시했던 영향으로 당시 조선의 모든 극단에서 개막 시간을 엄수하는 관행이 정착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 발췌 및 참고=우리 연극 100년, 홍해성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기념세미나 주제발표 자료, 홍해성연극상 시상식 팸플릿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기자 이미지

박주희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