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시민기자 세상보기] 아, 그리운 시절, 그 여름날들

  • 천윤자
  • |
  • 입력 2021-08-02   |  발행일 2021-08-11 제12면   |  수정 2021-08-03 08:27

온통 복숭아 천지다. 태양 빛을 닮은 복숭아가 생산자와 수량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농산물 공판장에서 선택을 기다린다. 일찍 출하된 포도와 자두, 그리고 아오리사과도 더러 보인다. 상인들이 모이고 경매가 열린다. 마트나 전통시장에는 복숭아 등 제철 맞은 여름과일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수필가는 "그리운 시절들은 다 여름에 있다. 여름이 젊음의 계절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 그리운 시절. 그 여름날들"이라며 여름을 예찬했다.

아버지는 평생 과수 농사를 지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 놀이터도 자주 과수원 언저리였다. 제비꽃과 민들레, 뱀딸기를 따다가 소꿉놀이를 하고 나리꽃에 찾아드는 호랑나비, 사과나무에서 목청껏 울어대는 매미와 웅덩이 주변을 맴도는 잠자리를 쫓아다니며 놀았다. 새벽녘 과수원길을 따라가면 낮에는 그렇게 애만 태우던 잠자리가 이슬에 젖은 날개를 접고 가시 울타리에 앉아 있어 쉽게 잡혔다.

무엇보다 과수원에는 초여름부터 먹을거리가 많았다. 축, 홍옥, 골덴, 스타킹, 인도, 국광이라 부르던 사과 수확이 가을까지 이어졌고 복숭아와 자두, 포도도 있었다. 여름은 맛난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크고 굵은 상품은 내다가 팔았지만 썩은 부분을 도려낸 사과와 태풍에 떨어진 낙과도 먹을 만했다. 물러서 팔 수 없는 복숭아는 더욱 먹음직했다.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온 그 남자는 어느 달 밝은 여름밤, 느닷없이 복숭아 서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울타리를 뚫고 밭으로 숨어들어 몰래 사과를 따다가 혼나던 동네 개구쟁이를 본 기억이 있어 만류했다. 싫다고 뿌리치는 손을 잡고 그는 과수원으로 내달렸다. 주인을 잘 알고 있으니 들키더라도 한두 개쯤은 봐줄 거라고 했다.

망을 보라고 시킨 키 큰 그 남자는 울타리 너머 손을 내밀고 알이 굵은 복숭아 두 개를 땄다. 남의 복숭아를 주저 없이 따는 이 남자,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도 될지 도덕성 검증을 할 겨를도 없이 공범이 된 나와 그는 동네 강가로 가서 대충 씻고 손으로 쓱 문질러 닦은 후 입으로 베어 먹었다. 주인 몰래 따먹은 수밀도는 금단의 열매처럼 다디달았다.

이듬해 그 동네로 시집을 갔고, 서리했던 복숭아밭 주인이 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들이 예비 며느리를 데려와 당신 밭의 복숭아 맛을 보여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시아버지는 두고두고 복숭아값을 내놓으라고 농담하셨지만, 덕분에 맛난 복숭아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복숭아와 포도 농사를 지으시던 시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능금밭 주인 아버지도 이제 봄이면 복사꽃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산으로 가 누우신 지 오래다.

천윤자

복숭아가 제철이다. 작열하는 태양을 받은 포도와 사과, 대추가 최선을 다해 익어가고 있다. 아, 그리운 시절, 그 여름날들.

천윤자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시민기자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