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시민기자 세상보기] 학원도시 경산과 육영재...참된 지역인재를 기르다

  • 천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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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06   |  발행일 2021-09-15 제12면   |  수정 2021-09-07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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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 하양읍에 위치한 육영재. 조선 후기 지역인재를 기르기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북 경산 하양읍 '육영재(育英齋)'는 조선 후기 지역 인재를 기르기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다. 당시 향교의 강학 기능이 약화되고 서원에 대한 억제정책까지 시행되면서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게 됐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유생들의 과거시험 준비와 학문 진작을 위해 건립된 교육기관이 육영재 또는 양사재다.

하양 육영재는 현감으로 부임한 이태승과 김이덕, 채석이, 허장 등 지역 유림이 주도해 건립됐다. 1823년 2월 하양향교에서 800m 떨어진 터를 선정하고 그해 6월 준공했다. 대청마루와 온돌방 등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부속 건물인 기숙사와 대문 등 건물 세 동을 짓고 '육영재' 편액을 걸었다. 필요한 재목은 환성사 안양실을 해체하고, 부족한 목재는 신령면에서 매입해 사용했다. 건립비용은 전액 성금과 기증으로 분담했으며, 부조전을 낸 사람이 무려 247명이나 된다.

오늘날 교칙과 같은 재규(齋規)를 정해 놓고 공부방법과 태도, 생활 전반에 대한 엄격한 질서와 규칙을 강조했다. 봄과 여름에는 과업 또는 과거시험 과목인 공령문(功令文)을 시험 치고, 가을과 겨울에는 성리학을 강론 강습했다. 사용한 교재로는 소학, 논어, 대학, 중용, 주역 등 주로 성리학의 가르침을 담은 유교 경전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지역의 사마시 합격자 12명 중 절반인 6명이 육영재 설립 후 나왔으니 사마시 합격자 배출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입학자격은 노비를 제외한 양인이면 누구나 가능했지만, 요즘 명문대학 입학만큼 치열했을 것이다. 선발된 유생은 학문에 전념했지만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을경우 훈장이 벌을 내리기도 했으니, 인성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육영재의 재규를 살펴보면 참된 공부란 지식습득뿐 아니라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실천, 윤리의식 등을 함께 교육했을 때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영재 복원을 위해 지역 유림이 자료조사와 발굴을 하고. 자체기금으로 차로 진입로를 사들였다. 경산시의 지원을 받아 확장 포장공사와 교각을 건립했다. 육영재 재산인 전답의 측량과 정리도 하고, 상수도 시설도 갖췄다. 이러한 노력으로 하양 '육영재'는 지난해 경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됐다. 이를 기념해 '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라는 제목으로 삼성현역사문화관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육영재 설립 취지부터 건립에 참여한 하양지역 유림의 명단과 기부금액, 공사일정, 운영체제 등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방대한 자료가 전시됐다.

'육영재' 혹은 '양사재'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세워졌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 더욱이 하양지역 유림은 200년 가까이 육영재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5월 중 날을 잡아 유림이 육영재에 모여 총회를 한다. 육영재는 지역의 미래를 인재양성과 교육에서 찾고자 했던 선비의 희망이 서린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경산이 대학도시가 된 것도 대구와 인접한 지리적 위치뿐 아니라 학풍을 중시하는 지역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글·사진=천윤자시민기자kscyj83@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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