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미래 먹거리 창출 포항가속기연구소(4)] 과학을 넘어 고고학, 미술과 같은 인문학 분야에도 활용

  •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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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25 10:34   |  수정 2021-09-25 10:53
미세한 원자와 분자까지 들여다보며
도자기 유약, 그림과 물감의 비밀 분석
작품의 숨겨진 비밀과 시대상까지 밝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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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에서 생산된 천목자기(왼쪽)와 고달사 절터에서 출토된 천목자기 조각(오른쪽).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방사광가속기는 거대한 슈퍼현미경으로 비유된다. 전자가 자기장 속을 지날 때 휘어지면서 접선 방향으로 나오는 빛을 이용하는 장치인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의 속도로 올렸을 때 생기는 밝은 빛(X선)으로 미세한 물질이나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미세한 원자와 분자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에다 방사광가속기는 과학 분야는 물론이고 고고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풀밭' 밑에 숨겨진 초상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해외작가들의 명화들은 대부분 유화(Oil painting)다. 유화 물감은 작업하면서 덧칠을 통해 쉽게 보완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큰 특징은 내구성이 좋아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그림 속에 숨겨진 그림이 방사광가속기에 의해 발굴되기도 했다.


이 중 하나가 반 고흐의 그림 '패치 오브 그래스'(Patch of Grass·1887년) 작품이다. 반 고흐는 자신의 전체 작품 중 3분의 1가량을 밑그림 위에 여러 차례 덧칠하는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의 델프트 공과대학교는 독일 방사광가속기에서 최첨단 X-선 형광 미세 분석(XRF) 기법을 이용해 '풀밭' 아래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패치 오브 그래스 작품 아래 그려졌던 밑그림은 한 여성의 초상화였다. 당시 물감은 돌가루를 주요 재료로 사용했는데, 납과 구리, 비소, 안티몬, 아연, 수은, 바륨 등 다양한 원소가 검출됐다고 한다. XRF 기법을 이용해 숨겨진 물감 재료들의 원소 분포를 얻었다.


XRF 기법은 고고학과 예술품 분석에도 사용되고 있다. 높은 정밀도와 정확성을 가지며, 휴대용 XRF 장비보다 분석 면적이 넓고 분석 속도가 매우 빠르다. 또한, 해상도가 높아 유럽에서는 많은 해외 명화 분석에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 인상파 작품에서도 또 다른 발굴이 있었다.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이 소장하고 있는 에드가 드가의 작품 'Portrait of a woman'는 국립 미술관에 처음 소개될 때, 얼굴빛이 피를 흘리는 유령 같다는 등 엇갈린 평이 나왔다. 이에 미술관의 연구진들은 호주 방사광가속기(Australian Synchrotron)를 이용해 작품 속에 숨겨진 여인의 초상화를 찾아 숨겨진 또 다른 초상화의 색소로 인해 변색이 나타났음을 확인했다.


■유물 분석해 과거 시대 상황 유추
국내에서도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한 과거 유물을 분석, 그 시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포항가속기연구소는 고려 시대 초기 3대 선종 사찰 중 하나인 경기 여주 고달사 절터에서 출토된 갈색 도자기를 분석한 적이 있다. 포항가속기연구소는 흔히 고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방사성 연대 측정 방법을 이용하지 않고, 방사광 X-선 산란 실험을 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유물을 만들어낸 시기와 장소, 제작 방법까지 알아낼 수 있어서다.
분석 결과, 이 도자기는 중국 복건성 건요에서 생산된 '천목'자기였다.


고려 시대의 가마터는 주로 창문이 없는 반지하에서 자기를 구웠으며, 산소가 부족해 유약에 포함된 산화철 성분이 변하면서 푸른빛을 띤 청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국 송나라의 가마터는 대체로 창문이 있고 산소가 잘 통하는 지상 가마터에서 자기를 구워 유약에 포함된 유약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원래의 붉은 빛을 띄고 있게 된다. 중국 '천목'과 고려 '청자'와 색상이 다른 원인을 밝힐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고려 승려들이 선종을 배우러 송나라에 유학을 많이 떠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소금 유약에 대한 비밀도 밝혀냈다.
포항가속기연구소는 유약 성분 분석을 통해 15세기 서양이 유약을 사용한 시기보다 우리나라가 5세기 앞서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소는 전남 영암군 구림리 토기 가마터에서 발굴한 유물의 유약을 분석한 결과, 소금(NaCl) 구조가 검출되는 것을 확인했고 이 가마터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주로 사용됐던 곳이어서 우리나라가 10세기 전반부터 소금 유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방사광가속기는 이처럼 숨은 작품 속에 또 다른 작품과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낼 수 있다.


포항가속기연구소 관계자는 "과학계와 예술계가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해 다양한 결과를 얻고 있다. 해외에서는 가속기를 활용해 고흐, 드가, 렘브란트, 피카소 등 명작을 다수 남긴 화가들의 감추어진 작품들을 찾아내고, 시대별로 예술품을 만드는 소재와 방식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에 있었던 상황까지 유추해 볼 수 있다"며 "국내에서도 방사광가속기를 과학 분야 뿐만 아니라 고고학, 미술과 같은 인문학 분야에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태기자 kt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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