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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불행한 유년기 부친은 타이타닉호 승선해 침몰 사망
3번의 결혼 실패, 여성 카사노바 불려
마음에 든 미술 작품은 무조건 구입...수많은 예술가의 뮤즈·후원자로 각광
2차세계대전 중 아무도 관심 없었던 초현실주의·추상미술 작품 대거 수집
천문학적 금액 현대미술품으로 거듭 구겐하임재단에 저택과 소장품 기증
양지바른 정원에서 개 14마리와 영면
그녀는 1898년 뉴욕에서 유대계 광산왕의 아들 벤자민 구겐하임과 금융가 셀리그먼 가문의 딸 플로레테 사이 '어마어마한 유산을 가진 금수저'로 태어났다. 그러나 유럽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바람둥이 아버지와 외가의 내력인 우울증까지 앓던 어머니는 극심하게 불화했다.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언제나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고집불통에 개방적이며 기발하지만 늘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으로 자라났다.
1912년 아버지 벤자민이 타이타닉호 침몰로 사망했다. 동행한 파리의 코르티쟌(애첩)과 하녀에게 구명복과 보트를 양보하고 '신사답게'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고 했다. 나중에 영화 '타이타닉'에서 만찬용 턱시도로 성장(盛裝)한 채 브랜디와 시가를 들고 하틀리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익사하는 장면으로 그려진 이가 그녀의 아버지 벤자민이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더욱 히스테릭해졌다. 열세 살 때였다. 홈스쿨링을 한 탓에 친구도 없었고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그 죄책감으로 심상은 깊었고 후유증도 오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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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만레이·1924) |
'나의 유년은 굉장히 불행했다. …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았다'. 부르주아를 경멸하고 명문가 여자의 삶을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표식으로 눈썹을 다 밀어버리는 등 대담하고 금기를 깨는 행동으로 가문에서 점점 이단아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경계가 없는 예술적 방랑을 자신의 길로 정하고 뉴욕의 한 서점에서 무보수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평생에 걸쳐 늘 스스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갈망한 그녀가 디딘 사회로의 첫 걸음이었다.
그곳에서 문학과 아방가르드 예술에 눈을 뜨자 문득 다른 세계가 궁금했다. 1920년 스무 살이 되자 파리로 갔다.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여러 작가·예술가와 교류하고 연애와 결혼, 이혼을 반복했다. 미술 작품을 좋아해서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맘에 드는 작품을 무조건 다 산다는 엄청난 유산을 받은 상속녀 곁으로 유럽의 모든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더군다나 연애지상주의자라지 않나. '달러 공주' '여자 카사노바' 별명이 붙여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점점 복잡하고 무질서하며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예술가의 뮤즈이자 후원자가 되어갔다.
그녀는 당시 미술계의 거장 뒤샹과 허버트 리드, 만 레이에게 초현실주의, 입체, 추상, 표현, 비구상미술에 대해 배웠다. 런던에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을 열었지만 적자로 문을 닫기도 했다. 1930년대 제임스 조이스의 비서를 하던 극작가 샤무엘 베케트를 처음 만나 열이틀을 호텔 방에서 딱 한 번 와인을 사러 나왔을 때 외에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그녀는 자서전에서 밝힌다. 그때 베케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초현실주의와 추상주의 작품을 구매하시오'. 20세기의 전설이 될 미술컬렉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결혼을 세 번 했는데 결혼생활은 모두 불행했다. 1922년 파리에서 충동적으로 결혼한 첫 남편 로렌스 베일은 무명 시인이자 화가였다. 둘 사이에 마이클과 페긴 남매를 두었지만 남편의 주사와 폭력으로 1928년 이혼을 한다. 두 번째 남편 천재 예술비평가인 존 홈스는 결혼 5년 만에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고 만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파리에서 '하루에 한 점씩' 초현실주의 명작들을 사들여 불바다가 된 유럽에서 미국행 선박에 극적으로 실어 보낸 뒤 많은 유대계 미술가를 미국으로 피신시킨다. 이것은 그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파리 중심의 세계 미술판도를 뉴욕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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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의 모빌과 피카소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페기 구겐하임. |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시민권을 빌미로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AoTC갤러리(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금세기미술관)를 열었다. '1942년 10월20일 화랑 개관일 밤, 나는 행사를 위해 맞춘 하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한쪽 귀에는 탕기가 만들어 준 귀고리를, 다른 쪽 귀에는 콜더가 만들어 준 귀걸이를 했다.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생애 가장 행복했을 그 시기에 그녀는 백부 솔로몬의 뉴욕구겐하임 목수로 일하던 잭슨 폴록을 발굴해 미국 현대미술의 슈퍼스타로 만들고 프리다 칼로 등을 발굴해 여성만으로 이뤄진 최초의 전시회인 '여성작가 31인 기획전'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남편 에른스트와 자신이 초청한 도로시 태닝과의 외도를 알게 되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녀는 아픈 기억만 가득한 뉴욕을 떠나 1947년 베니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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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과 14마리의 애완견 무덤. |
이후 1979년 사망할 때까지 30여 년을 사랑하는 강아지들을 기르기 위해 구입한 저택 팔라초(Palazzo Venier dei Leoni·사자들의 궁전)에 미술품을 전시하고 전 세계의 명사들을 불러 파티를 열며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사교계의 스타로 군림하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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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미술의 메카였지만 현대미술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탈리아에 그녀의 현대미술 컬렉션은 각광을 받기에 충분했고 그녀 또한 베니스를 사랑했다. 1967년 손자 셋을 남기고 우울증으로 자살한 딸 페긴으로 인해 단장지애(斷腸之哀)를 겪지만 큐비즘, 미래파,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등 현대미술에 매혹돼 가장 위대한 후원자, 컬렉터의 삶을 산 예술가들의 대모로 추앙받으며 그곳에서 드디어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다.
예술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녀였지만 역시 타고난 금전 감각을 가진 구겐하임 가문의 일원답게 2차 세계대전 당시 루브르미술관이 보관마저 거절했던 그녀의 수집품들은 2021년 현재 천문학적인 액수로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다. 그녀의 유언대로 저택과 모든 소장품은 구겐하임재단에 기증되었고 베니스 구겐하임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현대미술의 확신에 찬 위대한 후원자'로서 그녀는 그 정원의 양지바른 곳에 사랑하는 개 14마리와 함께 영면하고 있다.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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