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장정일과 길안

  •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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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5   |  발행일 2021-11-25 제22면   |  수정 2021-11-25 07:10
장정일의 詩 '길안에서의…'
현대문명 때문에 겪게되는
개인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
여행·詩作의 종점과 출발점
길안에 새 상상공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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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작년 여름 대학 동기로부터 부고가 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30여 년이 훌쩍 흘렀지만, 동기의 얼굴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길안(吉安)에서 온 친구, 대학 시절 언제나 해맑은 웃음을 지녔던 그로부터 나는 길안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길안은 내 마음속에 상서롭고 안온한 장소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장정일을 통해 다시 길안을 만났다.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읽으면서 장정일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었다. 소설가로서 장정일은 내게 큰 여운을 남기지 못했다. 오히려 장정일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시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였다.

"길안에 갔다. / 길안은 시골이다. /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 라고 / 나는 썼다. 그리고 얼마나 / 많이, 서두를 새로 시작해야 했던가? / 타자지를 새로 끼우고, 다시 생각을 / 정리한다. 나는 쓴다."

장정일은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쓴다. "길안에 갔다. /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다. / 그런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 / 별이 뜬다"라고.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고, 그곳에 저녁이 가까워 오고, 별이 뜬다. 이것은 시 쓰는 과정을 시화한 메타시(metapoetry)로 내가 그리던 길안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그런데 시인은 시를 구겨 버리고 다시 쓴다. "길안에 갔다. / 길안에서 택시를 기다린다. / 길안에 택시가 오지 않는다"라고.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고 밤이 오고 별이 뜨는데, 화자는 택시를 기다리고 택시는 오지 않는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시인은 "문득 길안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라고 했다.

"길안에 산이 높고 / 그 물이 맑다. 길안에 나무가 푸르고 / 나뭇가지 위에 비둘기떼가 지어올린 흰구름은 / 마치 건축같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 멀리서 바라봄이 아니라 길안 가운데 있을 때 / 길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면서도 시인은 길안을 벗어나기 위해 현대문명의 산물인 택시를 기다린다. 다시 시인은 쓴다. "길안에 갔다. / 길안이 아름다워 나는 울었다." 길안을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에게 길안은 불편하고 불안한 곳이 된다. 그렇지만 길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너는, 모든 길들은 /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 우리 있을 데가 없다"라고 읊는다.

"늬엿늬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 여행가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여행가와 시인은 찾아가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시적 화자는 길안에서 택시로 갈 길을 찾고, 시인은 방안에서 타자기로 글 길을 찾는다. 그러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마침내 "물과 물이 섞인 자리같이 / 꿈과 삶이 섞인 자리는, 표시도 없구나! / 나는 계속, 쓸 것이다"라고 시를 마무리했다. 이 시에서 여행가와 시인, 과거와 현재, 시골과 문명, 상상과 현실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장정일은 현대문명으로 인해 겪게 되는 개인의 고독과 불안, 공포와 초조를 잘 그려냈다. 그리고 썼다가 지우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수사를 통해 끊임없이 연단하는 연금술사의 도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길안을 여행과 시작(詩作)의 종점이자 또 다른 출발점이라는 새로운 상상공간으로 만들어냈다.

동기의 부친은 평생을 살아온 길안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 길안은 정 많은 동기가 살던 신비롭고 아늑한 고장이다. 길안에 가고 싶다. 설혹 문명의 편리함이 없다 한들 좋은 시 한 편을 만날 수 있다면 어찌 가지 않으랴.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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