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상공업의 어제와 오늘 .2] 김천장 전성기의 풍경…조선 최대 牛시장 서는 날이면 감천변엔 해산물 나룻배 북적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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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08 07:28  |  수정 2022-03-08 07:30  |  발행일 2022-03-08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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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의 김천시 전경. 일본인들에 의해 '정기 시장'에서 '상설 시장'으로의 전환기를 맞은 김천장이 감천 백사장과 맞닿아 펼쳐져 있다. <김천시 제공>

경부선 철도가 개통(1905년)되기 이전까지 김천장 역사의 대부분은 구전에 의존하고 있다. 공업과 상업을 경시한 당시의 사회 풍조 때문인지 김천장과 관련된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김천장은 형성 배경과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김천도역(金泉道驛)이 필요한 관급물품 조달 기능이 특화된 시장으로 유지되다, 조선 중기를 지나 민간의 수요까지 흡수하면서 완전한 시장기능을 확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士)·농(農)·공(工)·상(商) 순의 사회질서를 국가통치수단으로 해 엄격한 계급사회를 유지한 조선시대 지배 세력은 "지방의 상거래를 방임하면 백성들이 영리를 추구한 나머지 농업을 소홀히 한다"며 상업을 극도로 억압함으로써 민간 수요 중심의 시장이 형성될 여지를 차단했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 등 연이은 전란으로 농업 생산성이 크게 위축되고, 이에 따라 대규모의 유민이 발생하는 등으로 공고하던 신분제가 흔들린 조선 중기 이후의 사회상이 김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장은 경부선 철도 개통을 기점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서구식 시장경제에 밝은 일본인들이 김천의 지정학적 가치를 상업적인 측면에서 알아보고는 이익 창출의 기반을 닦고, 기존 상권을 장악하는 한편 김천을 기반으로 새로운 상권을 개척해 갔다.

다른 큰장과 달리 잡화 거래 '대형마트'
남해안서 들여온 수산물도 場 특산물

경부선 철도 개통 기점으로 전환 맞아
일본인에 의해 5일장서 상설시장으로
숱한 주막촌·거리 지명 '역동성' 방증


◆일제강점기 이전의 김천장

지방 거점에 설치된 도역(道驛)은 통신과 교통 외에도 관물(官物)·공물(貢物)·현물세(現物稅) 보관 및 수송, 사신 왕래에 따른 업무, 내·외인 규찰, 죄인 체포 및 압송에다 유사시 국방업무도 담당하는 병조(兵曹)에 소속된 권력기관이었다. 실제로 김천도역 수장인 찰방(察訪:종6품)은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김산(김천의 옛지명)군수(郡守:종4품)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조선 전기부터 광대한 지역을 관할한 김천도역이 관리한 각종 공물과 현물세 등의 경제재 규모는 방대했을 것"이라며 "특히 당시는 국가 소요량을 기준으로 부과한 공물 제도에서 비롯된 방납(防納:공물을 대납하고 이자를 받는 일)이 성행했고, 김천장은 김천도역 관할 지역의 방납 물자를 공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물은 백성의 등골을 휘게 했다. 천재(天災)를 입어도 감면되지 않는 데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공물로 부과되면 외지에서라도 구매해 헌납해야 했다. 또 헌납 가능한 공물이라도 국가가 필요한 시기와 맞지 않거나 생물 등을 원거리 수송하는 데 따른 문제(폐사, 부패, 원형 손상 등)는 방납 시장의 규모를 날로 팽창시켰다.

감천 변에서 시작된 김천장은 전국 각지에 5일장이 개설되면서 시장기능이 활성화된 17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영남·호남·충청을 아우르는 큰 장(3道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각지의 보부상은 김천장으로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숙박·화물 보관·위탁 판매·운송·대금(貸金) 등 금융업과 도매업 등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여각(旅閣)과 객주(客主)도 집단을 이루면서 큰 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이러한 가운데 김천장은 1800년대 중반 '조선 5대 시장'에 들기에 이른다. 이후 지례·개령·대덕·아천장 등 지역의 소규모 시장이 역로(국도 3·4호선)를 따라 개설돼 시장경제의 활기를 더했다. 일본인이 만든 통계자료에 따르면 1908년 김천장 매출액은 72만엔으로, 전국 5대 시장 가운데 1위인 대구서문장(108만엔)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송 사무국장은 "당시 조선 5대 장은 개성장(인삼), 강경장(젓갈), 대구서문장(포목), 평양장(곡물)으로 특화돼 있었다"며 "반면 김천장은 조선 최대 규모의 우시장을 가진 데다 방짜유기, 염장 어물 거래가 활발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큰 장들과는 달리 실수요자에게 필요한 온갖 상품(잡화)이 거래되는 요즘의 대형마트 기능을 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는 나룻배가 남해안에서 수산물을 잔뜩 싣고 낙동강과 감천을 따라 김천장까지 올라왔다. 장날이면 감천 양안을 배다리로 연결해 건너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기도 했다"며 "호남과 충청지방, 경남·북 내륙으로 화물을 운반하는 마차와 말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마을(마잠)이 김천장 가까이에 있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김천이 내륙임에도 수산물은 김천장의 특산물이었고 경쟁력 있는 상품이었다. 김천의 상인들은 해안 지방에서 갖가지 해산물을 들여와 소금에 절이거나 건조해 광범위한 지역에 공급했다.

김천의 토속음식인 '갱시기(갱죽)'는 식은밥, 콩나물, 김치 등을 넣어 끓여내는 간편한 음식이다. 반찬이 필요 없어 저렴한 데다 어디에서 먹어도 어색하지 않아 시간에 쫓기는 장꾼이나 서민이 즐겨 찾은 실용적인 음식으로, 저잣거리 많은 이들의 허기를 채워줬다. 김천에는 '주막거리'라는 지명이 유별나게 많았고, 곳곳이 '주막촌'일 정도로 주막이 많았던 사실 등은 김천장의 역동성을 짐작하게 한다.

◆일제강점기의 김천장

일본인들은 경부선 개통(1905년)과 통감부 설치(1906년)를 전후해 김천에 들어왔지만, 앞서 "김천은 내륙 오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갖춰져 있는, 장래가 가장 유망한 곳"으로 분석한 상태였다. 1905년 김천에 온 한 일본인은 이주 초기에 "소금을 수입하고, 콩을 수출하는 무역업을 벌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여러 사람이 그를 따라 이익을 거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1906년 3월 도로·수리(水利)·소방·교육·위생 등의 부문에 일본식 시설을 도입하기 위한 '일본인회'를 조직한 데 이어 같은 해 설치된 대구 이사청(식민 지배기구)의 '거류민단 규칙'공표를 계기로 '김천거류민단'을 결성하는 등 한일합병(1910년)에 앞서 뿌리를 내렸다. 이후 정기 시장(5일장)이었던 김천장의 상설화에 나서는 한편 김천~안동 경북선 철도(산업철도, 1923년 김천~상주 구간 개통)를 추진하는 등 김천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와 충청 지방을 겨냥한 상권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와중에 1914년 조선총독부는 '시장 규칙'을 공표해 시장 신설과 운영 변경에 관한 문제를 허가제로 묶고, 1호 시장(재래시장)은 일본인 상권과 상충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게 했다. 이어 '1도(道) 1시장(市場)' 원칙을 통해 김천장 같은 큰 장에서의 생선과 채소류 도매 기능을 불법화하는 등 기존 상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우위에 있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소금과 석유 등을 들여와 판매하는 한편 미곡(米穀)을 수출하며 빠르게 상권을 장악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전국 최대규모의 우시장을 배경으로 한 우피(牛皮) 무역(조선피혁주식회사)과 건어물 중심의 해산물 무역(영화상회)은 분야별 전국 제일의 수출 실적을 거두는 등 김천 상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고무신과 수공업 견직물(명주) 시장도 김천 상인이 장악했다.

1928년 기준 전국 5대 시장의 매출액 규모는 대구 서문시장(259만5천엔), 평양시장(150만엔), 김천시장(130만엔), 개성시장(115만엔), 강경시장(95만엔)의 순으로, 김천장은 큰 장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다.

1923년부터 부산일보 김천주재 기자로 활동했던 가노 야쓰마사는 저서 '김천전지(金泉全誌)'를 통해 "김천 용두동 일대의 시장은 장날이면 통행하는 사람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번화했다. 조선 중기 이후 김천장은 대구·강경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혔다"며 "'김천이 있고 시장이 있다'라고 하기보다 '시장이 있고 김천이 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김천장의 전성기 풍경을 전했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자문=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김천시사·김천상공회의소 105년사
가노 야쓰마사 저 김천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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