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상공업의 어제와 오늘 .4] 금광업 열풍, 집채만 한 도광기 10여대 쉴 새 없이 가동…노다지촌으로 불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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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05 07:25  |  수정 2022-04-05 07:37  |  발행일 2022-04-05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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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촌이었던 김천시 대야리 전경. 대야광산의 갱도는 가운데 보이는 산에서 시작돼 왼쪽 해인리 방향으로 뚫려 있다. <박광제 사진 작가 제공>

김천은 금(金)이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도시명(都市名)부터 금이 나는 샘(金泉)에서 유래됐다는 김천, 금이 나는 산을 뜻하는 김산(金山), 금이 나는 언덕인 금릉(金陵) 등 삼한시대 이래 명명된 모든 지명에 쇠 금(金)이 들어있다. 황금소면(黃金所面), 황금동(黃金洞), 금곡(金谷), 금화(金華) 등 금을 연상케 하는 마을도 많았다. 이러한 마을엔 금광이나 금과 관련된 산업이 성행했다. 김천의 젖줄 감천변의 사금(砂金)은 뭇사람의 희망이기도 했다. 상류에 산재한 금광에서 흘러든 사금은 김천에서 선산에 이르기까지의 감천 백사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게 한 것이다. 멀리서 감천변 사금을 좇아와 김천에 눌러앉은 사람도 상당수라고 한다.

부항면 등 일찍부터 곳곳에 금광 발견
일제가 독점하며 대량 생산체제 갖춰
광산에 지원금 주며 총력 다해 수탈
1931~36년 발굴 급증…年 1억규모 생산

뒷산에 흙 씻으면 나올 정도로 많아
주민들 온 산 뒤지며 채굴해 돈벌이
일본인들, 광복 후 다 못 가져 간 금
김천·부산 모처에 묻어뒀다는 소문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 금광 개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금광을 포함해 모든 광업을 국가가 관할하며 민간에는 광산 개발이 금지됐다. 그러다 17세기 중엽(1651년·효종 2)부터 조세정책의 하나로 설점수세(設店收稅)정책(정부가 광산을 개발하고, 채굴권을 민간에 넘겨 세금을 받는 반관반민 형태의 광산경영)이 시행되면서 민영 광업이 활성화됐다. 이후 잠채(潛採·광물을 몰래 채굴하거나 채취함) 형식 민영 광업, 덕대(德大·광산 소유자와 계약을 통해 광물을 채취하는 사람)제 광업 등으로 변화돼 왔다.

조선 후기부터 본격화된 덕대제는 사금광(砂金鑛)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했고, 대한제국기에는 광부가 수만명에 이를 정도로 금광업이 성행했다. 금광업 위주의 광업은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생산량이 5배 이상 증가할 정도였다. 여기에는 대일(對日) 수출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천문화원 발간 '향토사'에는 "김천은 지질학적으로 화성암지대에 속해 어느 곳에서나 규소질 암석과 장석을 볼 수 있다. 덕유산 지맥 삼도봉 일대의 부항면 오지는 산을 넘어있는 충북 상촌과 더불어 금광으로서 일제강점기에는 금 산출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김천시의회의 '김천시 부항면 폐금광 활용 체험관광지 개발방안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김천에는 부항면 대야리·해인리, 어모면 옥률리, 증산면 금곡리, 대항면 직지사 인근 등에서 금이 생산됐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부항면 대야리에서 금맥이 발견되면서 이 일대가 대규모 금광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김천에서는 일찍부터 다수의 금광이 있었으나 일제가 우리나라의 광물을 독점하기 위한 '광업법'과 '사광채취법'을 제정한 1906년 7월(조선통감부 설치 무렵) 이후에는 몇몇 금광이 대량생산 체제를 갖췄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충격으로 각국이 금 수출을 중단하자 금 확보에 다급했던 일제는 조선에서 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산금 증산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이는 김천에서도 금 생산량이 증가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는 1932년부터 '금 채광 장려금 교부규칙'을 통해 금광 시설비를 보조하는 한편 연간 1만원 이상의 금을 생산하는 광산에는 지원금(할증금)을 지급했다. 장래가 유망하다고 판단되는 금광에도 사업자금 2억원을 대출해 주는 등 조선에 매장된 금을 총력을 다해 수탈했다.

이 결과 1931~1936년 5년 사이에 금 생산량은 5.5배 증가했고, 이 시기에는 연간 1억원 정도의 금이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간 100만원 이상의 금을 생산한 초대형 금광으로는 운산금광(미국계 회사), 옹진금광(일본광업), 김제금광(미쓰비시광업), 순안금광(아사노 계), 광양금광(노구치 계), 의주금광(미쓰이 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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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광산 입구 전경. 젊은 시절 대원광산에 근무한 배기성씨가 안내하고 있다. <박광제 사진 작가 제공>

◆노다지촌이었던 김천

총독부로부터 장려금을 받을 수 있는 연 매출 1만원 이상의 금광은 한반도 전역에 57개나 분포돼 있었다. 여기에는 김천의 금광 가운데 대야금산(大也金山)이 포함돼 있다. 현재 대야광산으로 개명된 대야금산은 김천광업합자회사가 운영했으며 광부 73명을 고용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제의 '산금 증산' 실적은 한시적 기간의 기록일 뿐 김천의 금광산업과는 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된 부항면 대야리 금맥은 남한 최대 규모로 평가받았고, 이로 인해 '노다지촌'으로 불리게 됐다"며 "당시 대야리 일대에 뚫은 광구(鑛口)가 수십 곳이며, 여기에서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채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송 국장은 "특히 채굴량이 많았던 대량·금릉·대야·대원 등 4개 금광은 현재도 갱도(坑道) 등 금광 형체가 온전히 보존돼 있다"며 "가장 규모가 컸던 대량금광은 갱도의 총연장 길이가 10㎞는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 얘기에 의하면 4개 금광의 광부 규모와 생산량은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야리와 이웃한 해인리에도 여러 개의 광구가 산재해 있다.

가노 야스마사는 김천전지(金泉全誌)를 통해 "김천장에 있는 아키구치 사스케 가게의 1931년 한해 광물 거래액이 2만엔"이라고 밝혔다. 송 국장은 "당시 김천에는 금을 제외하고 채굴되거나 거래된 광물이 없었고, 금이 거래된 사실은 구전과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며 "추측하건대 금광에서 나오는 금보다는 감천에서 채취한 사금이 주로 거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저러한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어렴풋하게나마 김천의 금 생산량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등록된 김천의 금광은 13곳이다.

◆광부들의 기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금맥을 찾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이들은 마을주민들에게 금이 들어있을 만한 돌을 주워오라고 했고, 주민들은 주변에 널려있는 돌에 침을 뱉어 물기를 머금은 돌이 반짝반짝 빛을 내면 그 돌을 가져다줬다. 그들은 금이 확인되면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돌이 있었던 곳을 탐색했다. 이러다 보니 주민들은 온 산을 뒤지며 금이 나올만한 곳의 돌을 깨뜨려 가져다주며 돈벌이를 했고 일본인들은 수월하게 금맥을 찾아다녔다.

김천시 부항면 대야리 배기성(89)씨는 열여덟 살 때부터 대원광산(금광)에서 일했다. 당시 소장은 일본인이었으며, 금이 많이 나오는 날은 석유통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여서 사람들이 나르지 못하고 수레에 싣고 운반했다. 광복 후에도 매일 세숫대야를 채울 정도의 금을 캤다고 했다.

대야리와 이웃한 해인리의 정인규(85)씨는 광복 후 5~6년 동안 마을 뒤 삼도봉 자락의 메타골광산에서 일했다. 입구에서 170m 정도 뚫고 들어간 갱도를 오가며 일을 한 보수는 하루에 쌀 3되 정도로, 추수기 농사일 일당(쌀 5되)보다 적었다고 했다. 그의 기억으로 강점기에 메타골과 무티골 두 곳의 광산은 각각 매일 1관(4.5kg) 정도의 금을 채취했다. 광산이 한창일 때는 외지인 100여 명을 포함해 200명 이상의 광부가 있었다. 집채만 한 도광기(搗鑛機·광석 분쇄기) 12대가 쉴 새 없이 가동됐다. 해인리의 금광 갱도는 전북 무주군과 충북 영동군까지 연결돼 있다고 한다.

정씨는 "작은 마을에 술집과 기생집(8곳)이 즐비했고, 골목길은 행인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붐볐다"고 말했다. 일제는 주재소를 두고 치안을 유지했다. 같은 마을 이윤호(66)씨는 "마을 뒷산의 흙을 물에 씻으면 금이 나와 사금 채취도 성행했다고 들었다"며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가져가지 못한 금을 김천과 부산 모처에 묻어뒀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금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자문=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김천시 부항면 폐금광 활용 체험관광지 개발방안 연구용역(김천시의회)·가노 야스마사 저 김천전지· 김천문화원 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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