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상공업의 어제와 오늘 .5] 우시장과 축산업…19세기 김천場 명성은 우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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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19   |  발행일 2022-04-19 제12면   |  수정 2022-04-19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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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김천우시장 전경. 현재 김천시 맑은물사업소 자리에 있었다. <김천문화원 제공>

일찍부터 김천의 우시장(牛市場)은 수원·진주 우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우시장으로 꼽혔다. 1800년대 중엽에 전국 5대 시장 반열에 오른 김천장의 영화도 이처럼 큰 우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성기 김천장의 주거래 품목에서 축산물 비중이 가장 높았고, 그 주종은 우시장을 통한 소(牛) 거래와 쇠가죽(牛皮) 무역이었다. 활발한 도축업(屠畜業)은 우피 생산을 촉진했다.

일찍이 수원·진주와 함께 3대 牛시장
장 전날 워낭울리며 재 넘는 소떼 장관
농사 소 사육도 활발…1929년 1만마리

대형 도축장·가죽 건조할 백사장에다
훌륭한 물류기반인 경부선까지 갖춰
개항기 對日 3대수출 우피무역 최적지


◆김천의 축산업과 우시장 기반

일제강점기에 경북선 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문화와 발전사를 기록한 '경북연선발전지(慶北沿線發展誌, 1931년 발간)'에 따르면 1929년 말, 김천에는 소 9천9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었다. 평야가 발달해 논 농업이 성행한 김천·개령·아포·아천면 지역은 경우(耕牛, 논밭을 갈 때 부리는 소)의 쓰임새가 많아 힘이 센 수소를 주로 사육했고, 산간지역인 지례·부항·대덕·증산면에는 증식을 위한 암소와 송아지 사육이 활발했다.

김천의 우시장은 역내외(域內外)에서 안정된 공급원과 수요처를 확보했다. 역내의 지례·대덕·이천장(배시내) 외에도 편리한 접근성이 바탕인 지정학적 우위와 수완 좋은 상인들을 활용해 인근 여러 지역의 매물(소)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전국 각지의 상인들을 통해 수요를 확대했다. 특히 경부선은 김천 우시장의 수송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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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천우시장 전경. 계류시설에서 경매를 기다리는 소들이 보인다. <김천축협 제공>

◆김천 우시장의 전성기

"거창, 상주, 영동, 선산 등지에서 김천 우시장을 보기 위해 하루 전에 출발한다. 거창 방면에서는 지례에서 하루를 묵고, 선산과 의성 방면에서는 배시내에서 하루 묵어 김천 우시장에 당도했다. 그때는 3·8일이 거창장, 4·9일이 지례장 날이었으며, 양 지역에서 매집한 소를 야간에 김천장(5·10일)으로 이동시켰다. 소몰이꾼에게 몰려가는 수십 마리의 소가 워낭을 울리며 해 질 무렵 재를 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과거 김천장 전야의 풍경이다.

당시 소 상인들은 농가나 수집시장에서 소를 매입하는 수집상, 우시장에서 매매를 담당하는 중개상, 각지 우시장으로 소를 이동시키는 이동상인 등으로 역할이 분담돼 있었다. 수집상들은 수집시장(각 지역의 장)을 순회하며 매집한 소를 집하(集荷) 시장인 김천 우시장에 출하했다.

기록상 김천의 대규모 우시장은 1922년 감천 제방이 축조된 이후에 조성됐다. 제방을 쌓기 이전까지 백사장이었던 감천변(용우머리)에 들어선 우시장에서는 1929년에 이르러 연간 5천900여 마리가 매매되고, 거래액이 35만원에 이르는 등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1930년대에 들어 장이 서는 날이면 500~600마리 정도가 거래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흑역사는 고유의 적황색 털을 지닌 재래종 한우(韓牛)에게도 쓰여졌다. 당시 김천 우시장에서 거래되는 대부분의 소는 재래종 한우였으며, 인근 지역의 한우는 전국 각지의 한우들과 함께 대량 일본으로 수출돼 그들의 재래종 소를 개량하는데 필요한 종모우(種牡牛·종자가 좋은 황소)나 일소(경우)로 부려졌다. 일제는 '축산연구사업보고서'에서 "(조선의 한우는) 일본 재래종에 비해 골격이 크면서 온순하고 영리해 일소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거친 사료도 잘 먹고 환경 적응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1910년부터 광복되던 해까지 국내 재래종 한우 150만마리가 일본· 중국· 러시아로 반출됐다.

김천전지(金泉全誌)에는 "김천군의 축산(소)은 옛 영남우(嶺南牛)이며, 체격이 우량하고 장대함이 특징이다. 해마다 5천마리가 수출됐고, 대부분 일본에서 일소로 쓰인다"고 기록돼 있다.

1960년대부터 김천 우시장 매매중개인으로 활동한 이정오(71)씨는 "당시 김천 우시장은 수원 우시장에 이어 전국 2위 규모로, '영남 우시장'이라고도 했다"며 "광복 이후 김천 중심의 각종 교통망을 통한 수송이 원활해지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장날이면 전국의 소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이때 규모가 큰 상인은 직원 15~16명을 두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주로 거창·웅양·성주·상주·고령·영동·옥천 지역에서 매집한 일소가 김천 우시장을 통해 진주나 창녕으로, 또는 전국 각지로 공급됐다"며 "한때 김천 우시장은 거래 규모에서 전국 1위에 올랐던 적도 있고, 우시장 내에는 식당이 16곳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고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1963년에는 총 9천539마리가 거래됐고, 이 가운데 3천500여 마리가 경부선 철도를 통해 경기도로 수송됐다. 김천 우시장에 등록된 매매중개인이 50여 명이었다.

김천 우시장은 1935년에는 황금동(현재 김천시 맑은물사업소) 부지(3천844㎡)로, 1967년에는 신음동(현재 조각공원) 부지(1만9천130㎡)로 이전한 데 이어 1989년 양천동(1만5천180㎡)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장소로 이전 당시는 연간 평균 1만7천여 마리가 거래됐으며, 2007년에는 전자 경매장을 완공했다. 김천축협이 운영하고 있다.

◆번성한 도축업과 우피산업

대규모 우시장에서 파생된 도축업과 우피 가공업도 활발했다. 자료에 따르면 가뭄과 불경기가 덮친 데다, 우역(牛疫) 예방접종에 힘입어 소의 폐사율이 감소하는 바람에 도축우가 줄었다는 1929년에도 1천216마리(폐사 114마리 포함)가 도축된 것으로 나타난다. 김천 우시장의 부속 시설인 도축장의 쇠고기 공급권역은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돼 있었다. 전국에서 상인이 몰려와 쇠고기를 구매한 것이다.

이처럼 활발한 도축업은 개항기(1876~1910년)부터 대일(對日) 3대 수출품목의 하나였던 우피를 대량 생산하는 기반이 됐다. 1921~1923년 경부선 김천역을 통해 외지로 나간 우피는 모두 1천778t으로, 전량 일본에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에서 이주해 온 김기진이 설립한 조선우피무역주식회사는 연간 매출액이 20만엔(1931년)에 이르는 등 규모화된 우피 산업을 김천에 정착시켰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김천은 대형 도축장을 통해 다량의 소가죽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다, 가죽 건조에 적합한 감천 백사장과 훌륭한 물류 기반(경부선)을 갖추고 있는 등 우피 무역의 최적지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우리 국민은 쌀 등 상업의 주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상태에서 우피, 건어물, 해산물, 고무신 등의 영업권을 겨우 유지했다. 김천 출신 김연만(1904년 출생·우피 무역상 김기진의 아들)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조선원피판매주식회사 대주주로 있었다. 그는 1939년 이태준·정지용·이병기 등을 필진으로 문예지 '문장'을 창간한 데 이어 1944년에는 '조선이동창극단(朝鮮移動唱劇團)' 창설에 참여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활발한 문화 활동을 펼쳤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조선노동당이 남한 대중 포섭을 목적으로 각 지역에 결성한 '구국투쟁동맹'에도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자문=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김천상공회의소 105년사, 김천시·금릉군 향토사, 향토문화전자대전, 가노 야스마사 저 김천전지, 쓰지 스테조 저 경북연선발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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