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상공업의 어제와 오늘 .6] 농기계산업의 본산...몇몇 업체는 전국 대리점이 7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사업 번창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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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2 11:11  |  수정 2022-05-02 14:11  |  발행일 2022-05-03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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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철공소에서 생산한 쟁기. 진영종합기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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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종합기계의 주력 상품인 광역살포기가 트럭에 실려 있다.진영종합기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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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철공소에서 제작한 족답식 탈곡기. 진영종합기계 제공
환선공작소
김천의 농기구 제조업체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환선공작소 전경. 김천시 제공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김천은 국내 농기구제조업의 중심지였다. 이처럼 활발했던 농기구제조업도 김천에서 흥했던 여타 품목과 같이 사통팔달의 교통망에서 비롯된 물류 기반과 경기·전라도, 김해평야 등 농기구 최대 수요처인 곡창 지대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에 힘입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정부 수립 후 단행된 농지개혁으로 자영농이 증가함으로써 탈곡기 수요가 팽창한 시대적 상황도 활성화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김천 농기구제조업의 역사
김천의 농기구제조업 역사는 족답식(足踏式) 탈곡기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일제강점기부터 농기구가 생산됐지만 이때는 논이랑을 몰고 다니며 잡초를 제거하는 제초기, 솜을 뜯어 부풀려 펴는 타면기, 보리를 찧는 정맥기, 제분기 등이 주종이었다.

 

한반도를 식량 조달 기지화하려 했던 일제는 1900년대 초반부터 자국 농민들을 한반도로 이주시키는 한편 영농 기계화를 추진하며 그들의 농기구를 들여와 보급하는 등 농업 생산성 향상에 주력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두 종류의 쟁기를 개량해 땅을 더 깊게 갈아엎을 수 있게 만든 쟁기, 석유발동기로 구동되는 정미기, 양수기 등 당시로는 혁신적인 제품들이 이때 들어왔다. 김천 농기구 제조업의 주력 상품이었던 족답식 탈곡기는 우리의 손기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사람이 발로 밟아 동력을 얻는 구조라는 데서 명명된 '족답식 탈곡기'는 성인 3명이 하루에 40가마니 분량의 벼를 탈곡할 수 있을 만큼 노동력 절감효과가 큰 획기적인 제품이었으며, 김천에서는 6·25 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1965년 기준으로 김천에는 20여 개의 농기구제조업체가 성업 중이었고,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연 환선공작소(1930년)의 생산 품목에는 족답식 탈곡기가 없었던 점과 해방 직전에 개업한 남종양행(1943년)이 탈곡기를 생산했으나 그 시기는 불분명한 점 등에 미뤄볼 때 일제강점기에는 탈곡기가 생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 업체 대부분은 해방 이후에 설립됐다.


농기구제조업체 관계자들에 따르면 몇몇 업체는 전국 곳곳에 개설된 대리점이 7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심지어는 주문량 폭증으로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물량 확보에 비상이 걸린 전국의 대리점주들이 일제히 김천으로 몰려와 화물차를 대기시켜놓고 며칠씩 여관에 묵으며 공장에서 탈곡기가 출고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태까지 빚어지곤 했다. 도저히 납품할 수 없어 미리 받은 대금을 반환한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당시 남종양행, 한일농기사, 동광농기사, 진영철공소 등이 규모가 큰 축에 속한 가운데 한일농기사가 족답식 탈곡기를 연평균 3천여 대, 진영철공소가 2천500여 대를 생산했다고 한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두 회사의 생산량을 참고해 김천업체 전체의 생산량을 어림할 수 있다. 이처럼 호황을 누리던 김천의 농기구제조업은 자동탈곡기 이후 콤바인 등 농업기계 등장으로 사양길로 접어든다.

◆진영종합기계
진영종합기계는 광복 직전인 1945년 3월 설립된 진영철공소 후신으로, 80년 가까이 농기계 사업만 하며 강인한 생존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회사도 창업 초기에는 김천의 여느 농기구 제조업체처럼 족답식 탈곡기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쳤으나 시장의 변화에 한발 앞선 대응과 인화를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영종합기계는 족답식 탈곡기 시장이 한계에 이르자, 주력 상품을 전자동 탈곡기로 전환해 1980년대 중후반까지 무난히 사업을 꾸렸다. 이후 본격적인 콤바인 보급으로 탈곡기 시대가 저물어 갈때에도 양수기, 가정용 정미기 등으로 생산 품목을 다양화하는 등 기민한 대체 능력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전력을 쏟은 비닐하우스 자동개폐 시스템개발이 무위로 끝나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곧이어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로 제작한 광역살포기가 주력상품이 되는 등 위기를 벗어났다. 이 회사가 만드는 광역살포기는 국내 최대 살포 거리(150m)와 최대 용량의 약제 탱크(4천ℓ)를 갖추고 유기농업에 필요한 각종 영양제, 효소, 키토산, 목초액, 미생물 등의 살포에 특화된 기능을 자랑한다.


최훈민 현 진영종합기계 사장은 창업주의 손자이며 2대 사장의 아들이다. 이처럼 3대를 무탈하게 이어온 회사 경영만큼이나 노사 관계도 원만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37년을 근속한 강만식(66) 전무는 "우리 회사는 탈곡기를 생산하며 특화된 기계기술과 전문가 영입을 통해 확보한 신기술을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김천 농기구제조업체 중 진영기계만 유일하게 존속한다"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한일인더스트리
한일인더스트리<주>를 얘기하려면 그 전신인 한일농기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1960년에 설립된 한일농기사는 지역의 농기구 제조업체들 가운데 후발업체이지만 쟁기, 족답식 탈곡기, 제초기 등을 생산하며 단시간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서울 한복판인 중구 소공동에도 대리점과 전시장을 뒀을 정도였다.


이같은 호황 속에서도 족답식 탈곡기 시장은 벼랑 끝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작동되는 족답식 탈곡기 시대가 저물고 발동기로 구동되는 반자동탈곡기가 등장한 것이다. 볏단만 움켜쥐고 있으면 탈곡이 되는 반자동탈곡기는 사람이 탈곡기 페달을 밟으며 동력을 얻는 족답식과 효율성에서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곧이어 볏단만 풀어 놓으면 탈곡이 되는 자동탈곡기가 등장했고, 당시 보급이 확대된 경운기의 동력을 활용한 자동탈곡기 사용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농기사는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와 김천의 농기구 제작업체 중 최초로 자동탈곡기 생산에 뛰어들었고, 뒤를 이어 몇몇 업체도 자동탈곡기 시장에 진출하며 시장 변화에 대응했다. 그러나 자동탈곡기 시대는 길지 않았다. 자체 동력으로 경작지를 주행하며 탈곡을 하고 볏짚 등 부산물까지 정리하는 콤바인 등장이 예고된 것이다.


진광환(64) 전 한일인더스트리 대표(는 "전자동탈곡기 시대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였다. 이에 앞서 선친(창업주)께서는 정부에 콤바인 생산계획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다"며 "당시 정부는 '우리나라는 아직 경지 정리도 제대로 안된 상태라 콤바인을 사용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답변해 왔다"고 기억했다.


진 전 대표는 "당시는 3차 산업으로 넘어가던 시점이었고, 정부의 지원도 3차 산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김천의 농기구제조업은 콤바인이 등장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경운기에 탈곡기를 얹힌 게 콤바인이고 모를 내는 이앙기도 같은 원리다. 제도적인 뒷받침만 되면 제작에 어려울 게 없었다. 어느 정도 환경만 갖춰졌더라도 김천의 농기구제조업은 크게 성장했을 것 "이라고 장담했다.


이런 가운데 1992년에는 국내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밭농업 전용)관리기를 생산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일무역역조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 정책으로 일본 혼다 제품인 관리기 엔진을 수입할 수 없게 됐고, 여기에서 파생된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동력 운반차, 궤도차량 등을 개발하는 한편 건축재를 생산하며 활로를 모색하는 등 남다른 투지를 보였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자문=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김천상공회의소 105년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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