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상공업의 어제와 오늘 .8] 특화된 유기산업…김천유기의 진수는 '방짜징'에 담겨 있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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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07 07:13  |  수정 2022-06-07 07:17  |  발행일 2022-06-07 제8면
장인 1천여회 망치질과 담금질 반복
황소울음처럼 가슴 깊이 파고드는 울림
제기·식기류 외에 농악기로 특히 유명
조선때부터 황금동 일대 유기공방 밀집
이젠 3代 가업 양천동 '김천고려방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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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김일웅 김천징장이 방짜징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김천고려방짜 제공>

각종 연구를 통해 그 기능이 재조명되고 있는 유기(놋쇠)는 김천의 특산물이었다.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식기를 비롯해 다양한 유기 제품을 생산했으며, 각종 유해균과 유해 미생물에 대한 살균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밝혀진 방짜유기 제품이 대표 상품이었다. 수십 차례의 열처리 과정을 거치며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유기는 고온에서도 유해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고, 농약 등 독성물질에 반응하는 한편 보온과 보냉 효과가 있는 '지혜의 산물'로 인식됐다.

◆김천 유기산업의 특성

유기산업도 김천에서 성했던 여러 분야의 산업처럼 대형 시장과 최적화된 물류 기반을 통해 광범위한 지역의 소비자에게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었던 환경이 성장의 비결이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김천의 유기산업 생성 시기는 특정할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시대부터 약수동 또는 약물래기로 불리는 황금동의 거창 방면 국도변에 유기 공방이 밀집돼 있었던 사실을 참고해 김천 유기산업의 연륜을 어림짐작한다. 김천의 유기산업은 일반 백성 사이에 유기그릇 수요가 크게 증가한 조선 후기부터 전성기를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김천은 안성·익산·남원·장흥·순천·함양·봉화·동래 등과 함께 6·25 이후까지 유기의 명맥이 이어진 곳이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조선 후기 전국 3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던 김천장은 유기산업이 번성하는 동력이 됐다. 여기에다 김천역을 기점으로 전국의 주요 지역과 연결되는 관로와 낙동강을 거쳐 김천(감천)에 이르는 수로는 유기 제품 유통을 원활히 하는 등 주요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특히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각종 의례에 쓰이는 제기(祭器)와 식생활에 필수적인 식기류 등으로 수요가 끊이질 않았던 유기는 당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각광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기산업은 여타 업종에 비해 생산 설비와 원료 확보 등에 있어 초기 투자금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라며 "광역화된 시장 확보는 사업 유지에 있어 필수 조건이었을 것이며, 김천장은 규모나 기능 면에서 유기산업의 시장성 확대와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는 "방짜유기로 특화된 김천유기는 제기나 식기류 외에도 농악기인 '징'과 '꽹과리'가 특히 유명했다"고 덧붙였다.

19세기 후반기(1878~1885) 보부상의 삶과 애환을 담은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는 "결세 좋다 안성유기/ 소리 좋다 정주 납천방짜/ 도듬질 좋다 김천방짜/ 떡 맛 좋은 놋양푼에/ 장맛 좋다 놋탕기/ 살결 좋은 놋요강/ 분벽사창에 놋촛대요/ 칠첩반상기가 입맛대로…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 1960년대 이전의 유기제품들이다. 집안에서는 조반기, 주발, 탕기, 보시기, 종지, 바리, 발탄기, 쟁첩, 양품, 대야, 쟁반, 제기, 접시, 향로, 요강, 촛대, 놋상, 수저, 놋비치, 함지, 밥통, 주전자, 적틀, 포틀, 모다기, 화로, 부삽, 타구 그리고 왕의 매화틀까지 놋쇠로 만들어졌다"는 대목이 있다.

이에 미뤄봐도 당시 김천유기는 유기의 대명사인 안성유기 못잖은 명성을 떨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제기·식기류·농악기 외에 다양한 생활용품으로도 생산됐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듬질 좋다 김천방짜"라는 대목은 김천유기가 주조기법과 단조기법으로 나뉘는 유기 제작 기법 중 주로 단조기법에 의해 제작됐음을 말해준다.

'단조'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바다기'를 불에 달궈 망치나 메로 쳐서 모양을 잡아가며 징, 꽹과리, 대야, 식기, 수저 등을 만드는 기법이다. 수십 번의 열처리 과정을 거치며 제작되는 단조 기법의 유기는 인체에 해롭지 않아 주로 식기류로 만들어졌고, 소리가 좋아 타악기 제작에도 사용됐다. 단조 기법에 의해 생산된 제품을 '방짜'라고 칭한다.

송 국장은 "김천의 유기산업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놋쇠라면 숟가락까지 전쟁물자로 공출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30여 곳의 공방이 유기 제품을 생산했다"며 "이후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강 생활용품이 등장하면서 쇠락했다. 한편 남산동 과하천 주변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유기제품인 곰방대(짧은 담뱃대)가 가내 수공업 형태로 생산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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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김천고려방짜 대표가 만든 방짜 다식세트.

◆김천 유기산업과 김천징

김천시 양천동 김천고려방짜 김형준 대표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김천징장 기능 보유자) 고(故) 김일웅씨 차남으로, 직계로는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으나 사업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전통 방식으로 징과 꽹과리 등을 제작하며 맥을 이어 왔으나 10여 년 전부터 수요가 급감한 데다, 그나마 중국산 등 값싼 수입품 농악기가 시장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청탁 금지법이 시행된 2016년 이후부터는 관공서 등에서 방문객 등에 대한 답례품으로 활용했던 수저 등 소품마저 매입하지 않는 바람에 어려움이 가중된 상황이다. 김천고려방짜는 김천의 유일한 유기 공방으로, 현재 김 대표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등록을 신청한 상태다.

김 대표는 "과거에는 마을마다 농악대가 있었고, 김천장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농악기를 사러 오곤 했다"며 "기술자 6명을 두고 공방을 꾸려갈 정도는 됐으나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농악을 멀리하면서 매출도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약물래기에 남아 있던 유기 공방(14곳 정도)의 기술자들도 부산 등 외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앞서 김천고려방짜는 농악기와 더불어 놋그릇, 수저, 제기 등을 제작하며 판로를 충청·경기·호남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고 김일웅씨는 12세 때부터 외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유기 제작기술을 전수했다. 그는 경남 함양에서 4대째 가업을 이어 오다 김천으로 이주한 외조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1977년 '제7회 전국 관광 민예품 경진대회'를 계기로 방짜유기 장인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전국유기보존회 회장을 역임하며 전통 방짜유기 전승에 심혈을 쏟았다.

김천유기 제조술의 진수는 방짜징에 담겨 있다고 한다. "웅장하게 울리면서 황소울음처럼 구성지고 깊고 긴 여운과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이 있다"고 평가받는 징 소리는 1천번이 넘는 장인들의 망치질과 반복된 담금질 등 각각의 공정에 숨겨진 비법과 땀이 어우러져 빚어낸 작품이다.

송 국장은 "구리와 주석을 일정한 무게 비율(160대 43)로 혼합해 녹인 쇳물로 손바닥 크기의 '바다기'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는 김천방짜징 제조 과정은 세 단계의 공정을 거쳐 쇠의 강도를 조절하는 담금질에 이른다"며 "특히 담금질은 징의 생명인 소리가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공정으로, 통상 밤 11시에 시작해 이튿날 오전 6시에 마무리한다. 어둠 속에서 쇠의 빛깔을 통해 쇠의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두 번의 울음잡기(풋울음과 재울음)를 거쳐 완성된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자문=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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