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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형복 교수의 텃밭. |
無경운기·無비료·無농약·無제초
직접 만든 퇴비로 다양한 작물 가꿔
조미료 대신 채소 고유의 맛 살린 음식
자연친화적 삶 위한 전원생활 고집
건물 즐비해진 도시 떠나 시골로
아궁이 들여 장작 지펴 온돌방 즐겨
4월의 봄이다. 밤에는 제법 쌀쌀하지만 낮이면 기온이 20℃ 이상 올라가는 이맘때가 되면 땅은 마법을 부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옥매화, 해당화, 남경도가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정원을 지나 텃밭으로 간다. 얼마 전 씨 뿌린 열무의 여린 싹이 고운 얼굴을 내밀고, 부추, 쪽파, 상추, 방풍나물이 서로에게 뒤질세라 쑥쑥 자라고 있다. 텃밭 채소와 인사를 나누며 밤새 무탈한지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전원생활을 꿈꾸면서 집 가까이 딸린 생활텃밭을 계획했다. 텃밭이 집에서 너무 떨어져 있으면 아무래도 채소를 제대로 가꾸기 쉽지 않다. 돈으로 사 먹으면 그만이지만 채소만큼은 내 손으로 키워 먹고 싶었다. 다만 텃밭농사를 짓되 자연농법을 따르기로 했다. 기계로 밭을 갈지 않고(무경운),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으며(무비료), 농약을 치지 않고(무농약), 잡풀과 공생하는(무제초) '4무'에 더하여 퇴비는 직접 만들어 작물을 가꾼다는 '텃밭농사의 5대 원칙'을 세웠다. 관행농법을 따르면 편할 텐데 왜 굳이 삽과 호미 한 자루 달랑 들고 힘들게 텃밭농사를 짓는가?
나는 농사꾼의 아들이다. 어릴 때 시골은 화학비료와 농약, 비닐 등으로 오염되지 않은 맑고 깨끗한 상태였다. 그런 자연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은 행운이었다. 밖에서 뛰어놀다 돌아오면 엄마는 소박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엄마가 손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반찬을 곁들인 밥은 꿀맛이었다. 내 혀는 지금도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고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쌀 증산운동이 시작되어 농촌마을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초가지붕은 삽시간에 양철이나 콘크리트지붕으로 바뀌었고, 논밭에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살포되었다. 농민들은 맹독성농약을 뿌리다가 중독되어 쓰러지거나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6월 말쯤 모내기하고 가을걷이를 할 때까지 들판에는 온통 농약냄새가 진동하였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으니 도대체 농약을 얼마나 뿌려댔을까. 메뚜기와 미꾸라지가 사라지고, 땅은 날로 거칠어졌다. 그 땅을 갈기 위해 경운기를 비롯한 각종 농장비가 보급되어 영농의 기계화 바람이 불었다.
시골의 주방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데친 나물을 무칠 때 주로 참기름이나 깨소금 같은 천연재료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마법의 맛을 내는 화학조미료 열풍이 불었다. 주부들은 쉽사리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를 넣기 시작했다. 덩달아 아이들도 엄마의 손맛을 잃고 조미료 맛에 익숙해지고 말았으니 못내 안타까운 일이다.
조미료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과 같은 다섯 가지 맛을 간간하고 밍밍하게 중화시켜 버린다. 미각을 잃는 것은 맛을 느끼는 혀의 기능을 잃는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 몸의 예민한 감각을 무력화시키고 마비시켜, 종국에는 영혼마저 무미건조한 '한 가지 맛'에 길들이고 만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밥투정은 사치라 여기는 분위기에서 나고 자라면서, 오래도록 내 몸과 영혼이 원하는 맛을 찾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밥상주권'을 되찾고 싶었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는 생존의 문제로서 늘 고민스럽다. 대구의 음식은 짜고 매운 맛이 강하여 상당히 자극적이다. 거기에 조미료까지 더하니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면 온종일 혀끝에 인공의 맛이 남아있어 뒤끝이 영 찜찜했다. 자연재료로 음식 맛을 낼 수는 없을까? 오래전부터 고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텃밭농사를 짓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농사를 짓되 '5대 원칙'에 따라 음식물로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리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농사지어 채소를 거두면 그다음은 아내 몫이다. 아내는 인공조미료 대신 집에서 담근 된장과 고추장으로 양념을 하고, 인위적 가공을 최소한으로 줄여 채소가 가진 고유의 맛을 변형시키지 않고 음식을 만든다.
텃밭농사를 지으며 전원생활을 하는 본질적 이유는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도시에서 이런 삶을 누리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구조는 기계적이고 획일적이며 지나치게 기능적이다. 만일 도시가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도록 설계되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원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면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마치고 다시 고향 대구에 자리를 잡았을 때 고산시지지역에 정착한 이유는 단 하나, 아파트 주변에 산과 들이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개구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었고, 코끝에 닿는 은은하고 그윽한 포도 향기에 절로 취했다. 그 행복한 순간도 잠시, 수성의료지구로 지정되더니 우후죽순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불도저를 비롯한 각종 중기계와 차량이 내뿜는 소음으로 일상이 평온치 못했다.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어렵사리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덥히는 황토온돌방과 텃밭 두 가지를 고집했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아궁이와 텃밭이 사라진 도시와 농촌의 가옥구조에 대해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빼고 현대식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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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형복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인 |
요즘은 시골에서도 대부분 가스나 석유보일러를 설치하여 난방을 한다. 그럼에도 굳이 아궁이를 들인 이유는 온돌이 가진 장점을 알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늘 추웠다. 대리석 바닥은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겨울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새우처럼 웅크린 채 온몸을 이불로 둘둘 말아도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이 그리웠다. 그때의 힘든 기억 때문일까. 여름을 제외한 계절 내내 매일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불을 지핀다.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에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자연과 공존하며 인간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문명과 문화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하면 자연과 생태에 보다 덜 위협적이고, 침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에 합당한 생활방식을 찾고, 현실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전원생활과 텃밭농사를 선택했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듯이 죽을 때도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한다. 결국 자연에 묻히고 그 일부가 되어 썩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어쩌면 나는 전원에서 텃밭을 가꾸며 삶도 죽음도 없는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게 바람이 묻는다.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가가 보증한 땅문서로 공인된 소유권을 가진/ 나인가/ 풀인가/ 벌레인가."(졸시,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부분)
채형복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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