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시민기자 세상보기] 출판 천국의 아이러니 '버려지는 책'

  • 천윤자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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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2   |  발행일 2022-05-18 제24면   |  수정 2022-05-03 09:00
천윤자
천윤자 시민기자

모아둔 신문지를 버리려고 아파트 내 폐지 모으는 곳에 갔더니 겉장도 열어 보지 않은 듯한 새책 10여 권이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순간 누군가 잊고 가져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곳은 폐지를 모우는 곳이 아닌가. 분명 버려진 책이다. 제목을 보니 지역 어느 문학단체에서 지난해 발간한 동인지였다. 책장을 넘겨 차례를 보니 알 만한 분들의 이름과 작품명이 더러 보인다. 아까운 마음에 집으로 들고 왔다. 다음 달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나눠 주고 몇 편이라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서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필자는 책 욕심이 많았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구입할 수도 없었거니와 빌릴 수 있는 도서관도 많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고작 학교 도서관뿐이었다, 어쩌다 책 선물을 받으면 너무 소중해서 읽고 또 읽었다. 학년별로 선정해 준 고전읽기 권장 도서를 구입할 수 있는 학생도 많지 않았다. 독후감을 쓰고, 내용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독서퀴즈 같은 시험도 쳤지만 빌려서 읽을 수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가 사 준 한국위인전집은 더없는 보물이었다. 시골 아이였던 필자가 그나마 책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은 친척 아재 덕분이었다. 월부 책장사를 시작한 아재는 가끔씩 집에 들러 학교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던 안데르센과 이솝, 한국전래 동화, 한국위인전기, 세계위인전기 같은 여러 가지 전집이 인쇄된 기다란 광고지를 아버지 앞에 펼쳐놓고 생활고까지 함께 풀어 놓았다. 그런 날이 지난 후 책이 든 무거운 상자가 집으로 배달됐다. 아재의 월부 책장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필자가 받은 책은 이후 오랫동안 남아 친구들 앞에 우쭐대게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곳곳에 도서관이 생기고 책들도 넘쳐난다. 읽고 싶은 책은 근처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고 도서관은 먼 곳의 도서도 가져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독서 증진과 출판 장려, 저작권 보호 촉진을 목적으로 지정한 '책의 날'이다. 우리나라도 도서관마다 책의 날을 기념하고 관련 행사를 열었다.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사람도 늘었다. 이제 책 출판은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도 참여한다. 개인뿐 아니라 문학단체에서도 해마다 동인지를 발간한다. 판매 목적이 아니라 자비로 출판하고 지인에게 돌린다.

그러나 책이 출간되는 만큼 읽히지는 않고, 그냥 줘도 반가워하지 않은 세태인가 보다. 주워 온 동인지를 펴 읽으며 생각한다. 회비로 발간한 동인지…. 함께 활동하는 글벗들도 모두 자기 몫의 책을 나눠 가졌으니 더 줄 수도 없고, 책 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이웃에게 줘도 반가워하지 않으니 슬그머니 폐지로 내놓은 사람의 마음이 읽혀진다.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려놓은 필자에게도 수시로 책이 우편으로 배달돼 온다. 보내준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끝까지 읽으려 노력한다.

코로나 시대 집에 머무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책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독서 문화가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버려질 책이라면 발간하는 것도 신중했으면 좋겠다. 책을 만들기 위해 베어지는 나무에게 미안하다.


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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