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하인리히 슐리만…전설 속 트로이 터키서 발굴…신화를 역사로 증명해내다

  •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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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09   |  발행일 2022-09-09 제38면   |  수정 2022-09-0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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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 황금마스크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총 24권, 1만5천700행,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첫 구절이다. 어릴 적 내가 읽은 윤색된 동화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주고 간 황금사과를 두고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의 다툼이 일어났다.' 우리가 익히 아는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을 거쳐 윤색된 신화로만 여겨졌을 에게해의 전설을 우리 눈앞에 실제로 되살려낸 사람이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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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 부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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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신성과 추악함이 한 몸이더라'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에 대한 평가는 늘 논쟁거리가 된다. 트로이를 발견한 고고학계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같은 존재인지, 또는 단기간에 모은 엄청난 재산으로 도굴에 가까운 발굴을 하고 유물들을 불법 반출을 한 협잡꾼인지로 분분하다.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최대의 업적이자 가장 큰 '수치'가 되어버린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정확히 100년 전인 1871년, 슐리만은 터키 히사를리크에서 인부들을 모두 내보낸 뒤, 장벽 아래에서 칼로 황금 유물을 흙에서 파내어 아내 소피아의 숄에 누가 볼세라 쓸어 담고 있었다.

슐리만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그 서사시를 단순히 이야기로만 흘려듣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굳게 믿었던 유년의 꿈을 그렇게 실현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쓰던 무렵, 트로이의 왕성 이름은 '일리온'이었다. 그곳의 실재를 굳게 믿으며 신성한 '프리아모스의 보물'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를 아내의 숄에 숨겨 추악하게 집으로 가져갔다. 나중에 트로이뿐만 아니라 이타카, 미케네, 티린스까지 발굴하여 그리스 선사(先史) 고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지만, 그로 인해 슐리만은 지금까지 우리의 무령왕릉 발굴 이상으로 고고학계에서 지탄받고 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전인 1822년 독일 메클렌부르크 노이부코의 가난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다) 이듬해 담임목사직을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안케르샤겐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 에른스트 목사는 신앙심이 깊지 못하고 아내가 죽기 전 하녀와의 관계와 결혼 등 문란한 사생활로 몇 년 되지 않아 목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지만,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무훈담을 아들에게 들려주는 자상함도 있었던 듯하다.


호메로스 영웅 이야기 들으며 성장
신화의 실재 굳건히 믿으며 꿈 키워

국제사업가로 성공한 후 발굴 시작
터키 히사를리크 구릉 헐값에 구매
트로이 유적·유물 발견하는 데 성공

발굴하는 과정서 지층 파괴하거나
아내에게 치장시키고 불법 반출해
세계 고고학계의 거센 비난 받기도



아버지의 일탈과 가난으로 슐리만은 삼촌에게 위탁되어 직업학교에 다녔지만, 그마저 작파하고 열네 살 때부터 식료품 가게 점원으로 노동에 내몰렸다. 그때 소년은 아버지에 대해 '아주 위선적이고, 네로황제보다 포악한 미친개 같다'라고 일기에 썼다. 이후 비상한 수완으로 무기상 같은 석연치 않은 사업 등을 통해 큰돈을 벌고, 트로이 발굴이라는 불후의 업적을 이룬 뒤 쓴 회고록에도 '그런 사람의 아들이라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라고 탄식했다.

청년 슐리만은 안케르샤겐을 떠나 함부르크에서 암스테르담, 상트페테르부르크, 캘리포니아로 옮겨 다니며 40대 초에 '예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국제적 사업가로 성공한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열광적인 모험가의 모습으로 '세상을 보고 싶은 거대한 욕망'을 품고 그리스,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시리아, 인도, 중국,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정을 마감한 뒤 1867년 첫 저서 '오늘날의 중국과 일본'을 발표한다. 그때 고고학자의 길을 걷기로 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첫 부인 예카테리나와 결별하고 파리에 정착해 소르본대학과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공부한다.

동양어 강의, 이집트학과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와 아랍 철학자들, 고전 시, 근대 불문학과 비교문법을 그곳에서 배웠지만, 그는 이미 책을 모조리 외워버리는 방법으로 그리스어, 라틴어 등 13개 외국어 이상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리스를 샅샅이 여행하고 문헌학과 고고층위학을 공부하며 논문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를 써 로스토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와중인 1969년 '성격이 나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제자로서 나를 평생 존경하고 사랑할' 30살 연하의 아테네 포목상의 딸 소피아 카스트로메노스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고대도시 트로이, 호메로스 서사시의 근간을 이루었던 그 도시가 기실 히사를리크 구릉이란 걸 처음 밝혀낸 것은 1822년 찰스 맥라렌이다. 슐리만에 앞서 그곳을 발굴하고 있었던 것도 다르다넬스 지역 미국 부영사인 프랭크 캘버트였다. 슐리만은 캘버트가 일부 소유한 히사를리크 구릉 전체와 그의 권리까지 헐값으로 사들여 드디어 트로이의 찬란한 유물들을 발굴해낸다. 하지만 현재 밝혀진 9개 지층으로 쌓인 '중첩된 폐허'를 자신이 맹신하던 '일리아드' 층에 다다르는 데 급급해 금 캐듯 10m 이상이나 파고 들어가 BC1000년 이후의 유물을 파괴해버린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더군다나 발굴한 황금유물과 보석들을 아내에게 치장시켜 대대적으로 신문 지상에 발표하거나 전시회를 열고 또 은밀하게 아테네로 반출한 일로 오스만제국과 세계 고고학계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자신의 오류를 반성한 슐리만은 학계의 권위자 빌헬름 되르펠트를 영입하여 체계적인 방법을 택해 그곳이 고대로부터 아홉 기(紀)가 쌓인 9개 주요 지층임을 밝혀낸다.

이후 유물 밀반출로 인한 오스만제국과의 소송으로 히사를리크 발굴이 지연된 2년 동안 슐리만은 이타카,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 미니아의 유적지를 발굴했으나 별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동안 '트로이와 그 유적'을 펴내고, 미케네 발굴을 시작해 16구의 시신과 금, 은, 청동, 상아로 된 많은 보물을 발견해 '미케네'를 출간했다. 1884년 티린스를 발굴했다. 하지만 시도했던 모든 일을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테르모필레, 마라톤, 크노소스,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을 찾는 일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인식욕이 강하고 부를 얻었지만, 그 이상의 사회적 권위를 갈구했던 슐리만은 고고학자로서 수많은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열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크레타문명까지 직감적으로 찾아낸 고고학탐사의 선구자였던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찌감치 아테네에 대저택 '일리우 멜라트론'을 짓고 전처와 후처 소생의 아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으며, 여전히 이재에도 밝았던 슐리만은 가족들에게 유산도 많이 남겼다. 만년에 심한 귓병으로 괴로움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1890년 12월25일 나폴리의 한 광장을 가로질러가다 쓰러져 다음날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되르펠트와 소피아의 오빠가 아테네 제1묘지로 옮겼다. 수많은 사람이 조의를 표했는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가장 먼저 조문을 보냈다. 장례식에는 그리스 국왕 게오르그 1세와 총리, 미국 대사 그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학자가 참석했다. 그가 조국 독일로 반출한 중요한 트로이 유물들은 2차 세계대전 나치에게서 구(舊)소련의 문화재 부대(고스폰드)에 탈취되어 현재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에 있다. 터키 당국의 반환 요구마저 깡그리 무시한 러시아는 2003년 그 유물들을 자국에 귀속시켜버리고 만다. 21세기의 야만이랄 수밖에 없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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