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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펴낸 우광훈의 장편소설 '베르메르 vs. 베르메르'. 이 소설의 작품해설은 장정일이 썼다. |
2007년 가을, 나의 장편소설 '베르메르 vs. 베르메르'의 발문 관계로 서울에서 장정일 형을 만났다. 동화책 '월리를 찾아라'에 나오는 복잡한 그림 속 같은 서울역을 빠져나와 가까스로 올라탄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회기역까지 곧장 내달리는 이 코스는 시골 촌놈인 나에겐 환승이란 고된 신고식이 없어 너무 좋았다. 지상역인 회기역에 도착하니 형이 마중 나와 있었다.
형의 집은 경희대 인근 신축빌라 2층.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 클래식의 감미로운 선율이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형에게 있어 음악은 일상. 실내 분위기는 대구 본가의 모습과 비슷했다. 거실 중앙에 멋스러운 오디오가 놓여있었고 그 왼쪽에는 엄청난 양의 음반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거실 바닥을 가득 메운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 원목으로 된 나무의자 위에도 신간인 듯해 보이는 인문서적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좌음악 우문학(左音樂 右文學). 아니, 좌클래식 우인문학이 요즘 형을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형 서울집 들어서자 클래식 선율
나무의자 위엔 인문서적 '켜켜이'
내 소설원고 출간일정 의견 교환
시종일관 따스한 조언 잊지 않아
차를 마시며 우린 곧바로 내 소설원고의 출간일정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형은 시종일관 따스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최근에 깎은 듯 형의 머리는 푸르스름한 빛마저 띠고 있었고, '文'자가 선명하게 프린트된 흰색 티셔츠가 오늘따라 유달리 상징적으로 보였다.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고, 형과 경희대 앞 식당가에서 저녁을 먹었다. 샤부샤부를 흉내 낸 듯한 불고기정식. 대식가답게 형은 동치미 국물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경희대 교정을 걸었다. 아름드리나무로 울창한 정원은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교정은 축제기간인 듯 활기가 넘쳤고, 저녁 시간이 되어 그런지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형은 얇은 티셔츠 차림인 나를 향해 "대구는 아직 여름인가 보네요"라며 놀려댔다.
경희대 본관을 돌아 형의 집으로 향하면서 우린 이외수 선생님과 소설가 서준환씨의 작품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서준환씨는 고전음악 관련 웹사이트인 'Go! 클래식'에서 우연히 알게 된 분이라며 아주 좋은 소설가라고 했다. 형은 절친한 친구이자 랜덤하우스의 편집자인 H씨와만 연락을 주고받을 뿐 다른 문인들과의 교류는 전혀 없는듯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우린 다시 거실에 앉아 다과를 즐기며 음악을 들었다. 형은 흘러나오는 곡의 대부분을 외우는 듯했으며, "음악만 듣고 살았으면 좋겠어요"란 말을 연방 되풀이했다. 형은 김영사와 랜덤하우스에 계약된 원고가 있는 듯했고, 작업은 주로 새벽 시간대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내가 "형, 새로운 소설은 어떻게…"라고 조심스레 묻자, 형은 이제 딱히 소설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며 오랜 기간 소설을 쓰지 않아 당분간 창작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앞으로 인터뷰나 르포와 같은 형식의 글에 더 집중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난 근래에 읽은 작품 중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좋다고 했고, 형은 칭찬에 인색한 소설가 H선생도 오르한 파묵을 굉장히 높게 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 형과 함께 다시 회기역으로 향했다. 형은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잠시 들를 거라며 용돈을 챙겼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형은 기죽은 나의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광훈씨,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지 마세요. 재능을 의심하게 되면 자꾸만 확인하고 싶고 그러다 보면 결국 무리하게 되죠. 그냥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난 천재다…란 생각으로 조금씩 써 보세요. 딱히 이야기할 게 없다면, 아니 쓸 말이 없다면 안 쓰는 게 맞죠. 내가 뭐 한국대표 소설가도 아닌데…."
회기역 대합실. 노란색 지하철 티켓을 개찰구 안에 집어넣는 순간, 비로소 형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언제쯤 다시 서울에 올 수 있을까. 자주 와야지… 하고 매번 읊조려보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나는 잘 안다.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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