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보도연맹 학살사건

  • 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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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14   |  발행일 2022-09-14 제27면   |  수정 2022-09-14 06:45

[영남시론] 보도연맹 학살사건
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해방정국을 떠올려본다. 일본인이 다시 오겠다며 조선인에게 잘 지켜달라고 당부하고 적산 가옥·공장·농장을 놓고 물러갔다. 헐값에 팔고 가기도 했다. 미군이 남한에 들어왔다. 만주로 갔던 사람들도,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도 돌아왔다. 조선 광복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벌인 지사들도 돌아왔다. 친일배들은 갑자기 다가온 해방에 움칫하면서도 결탁할 세력을 궁리했다. 그때 외세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얼마나 환희와 행복을 느꼈을까.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 광산 부근을 지난다. 경산 상대온천과 한의대 쪽으로 가는 길에 있다. 일제하 1937년 채광을 시작하여 해방 직전 폐광된 곳이다. 이름도 생소한 광물질 코발트보다 민간인 집단학살이란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흉터로 남아 있다.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분단의 회오리 속으로 휩쓸려버렸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 북이 남침해 밀려왔다. 이승만 정권은 내려오며 이내 군인·경찰을 동원하여 차례로 전국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자행한다. 보도연맹원이 북에 가담할 것을 우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처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무기도 없는, 저항도 없는 민간인을 불러모아 무참하게 사살한다. 경산코발트광산에서는 그해 7월20일~9월20일 2개월여 동안 2천~3천500여 명(유족 측)의 보도연맹원(당시 대구형무소 수감자 포함)이 처형됐다.

보도연맹(원이름은 국민보도연맹)의 '보도(保導)'는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좋은 뜻이다. 정부는 정부수립 이후 국가보안법을 시행한다.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 연맹원을 모았다. 연맹원은 아무 권익도 없었다. 호출당하는 의무만 있었다. 좌익관련자가 가입대상이었지만 좌익과 무관한 사람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감언이설이나 협박에 의해 가입해야 했다. 인원수를 늘려나갔다. 정부는 지키지 않았지만 연맹원의 신분보장을 공표했었다.

보도연맹은 새로운 제도도 아니었다. 일제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하면서 1938년 7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이라는 긴 이름의 친일전향자단체를 조직, 황도정신·내선일체를 강화했다. '사상보국연맹'은 1941년 재단법인 '대화숙(大和塾)'으로 통합됐다. 해방 후 '사상보국연맹'을 본떠 당시 서울지검 검사였던 이태희·장재갑·오제도·선우종원 등이 주도하여 보도연맹을 발족시켰다. 이들은 최고지도위원으로 선출됐다. 일제 때 검찰과 경찰로 근무하며 유사단체를 직접 지도·관리하던 경험있는 검사 등이 제안한 이 보도연맹도 일제잔재인 셈이다. 정확한 수치는 없으나 가입 보도연맹원은 30만명(두산백과), 6·25 때 학살당한 희생자는 20만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으로 추정된다. 대구경북에서는 경산코발트광산 외에도 청도, 영천, 김천, 달성 가창 등 곳곳에서 자행됐다. 부산·울산·경남, 그리고 호남에도 수없이 많다. 72년 전이지만 절기상으로 며칠 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조상 묘소에 성묘하러 가려던 삼촌과 조카가 문 앞에서 잡혀 골로 가서 희생되기도 했었다.

동족에 의해 골로 가버린 이 나라의 주인들은 얼마나 비통해했을까. 아무 말도 못하고 연좌제를 당한 유족들은 얼마나 원망하며 살았을까. 억울하게 먼저 간 그분들의 명복을 빈다.
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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