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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
올해 추석에는 백 년 만에 가장 둥근 보름달이 떴다. 오랜만에 만난 친정 식구들과 저녁밥을 푸짐하게 먹고 동네 하천 둔치에 나가 달마중을 했다. 우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둥근달이라서 그런지 달맞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파트 단지와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미는 달님을 기다리다 보니, 얼마 전 완독한 소설 '토지'의 서(序)장 부분이 생각났다.
"달이 떠오른다. 강이 굽이쳐 돌아간 산마루에서 달이 얼굴을 내비친다. 까맣게 찢긴 나뭇잎들의 흔들리는 모양이 뚜렷해지고 밋밋한 나뭇가지는 잿빛, 아니 갈빛을 띠기 시작한다. 꽹과리 징 소리가 먼 곳에서 흐느껴 울고 강가에서 부르는 처녀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좀 더 가깝게 들려온다."
박경리가 26년간 집필해 온 '토지'의 첫 부분은 "1897년의 한가위"라는 시간적 배경을 글머리에 두고,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가을 들판과 흥성한 추석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차례와 성묘를 마치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면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신명 나는 풍물놀이 판이 펼쳐지자 온 동네가 들썩인다. 달 뜨기를 기다려 강가로 모여드는 마을 처녀들의 노래는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평사리 사람들의 소망을 담고 있으리라. '토지'의 한가위 풍경이 이렇게 흥겨운 것만은 아니다. 소설의 화자(話者)는 흉년에 굶어 죽어간 늙은 부모, 돌림병에 죽은 자식, 민란 때 원통하게 죽은 남편, 흙 속에 잠이 든 숱한 이웃들을 불러내며, 가난한 영혼들에게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하는 축제"라고 덧붙인다.
이처럼 작가 박경리는 원고지 3만1천200장 분량, 전체 5부 25편 326장(序 포함)의 대하소설 '토지', 그 서두를 "풍요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쓸쓸하고 가슴 아픈 축제"라는 다중적 풍경으로 열고 있다. 서장에서 다룬 1897년 한가위 하동 평사리의 풍경은 최참판댁 그늘 아래 추석날 하루만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가난한 영혼들의 처량한 삶의 축제를 압축적으로 재현한 것인데, 이는 이후 '토지'의 서사를 추동하는 것이 최씨 일가의 가족사를 넘어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영혼들의 이야기임을 내포하고 있다.
한가위 달마중을 하며 '토지'의 첫 장면을 떠올린 것은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던 1897년의 가난한 영혼들에게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달 아래 세상 모든 생명이 하나같이 귀하게 보인 것도 '토지'와 무관하지 않다. '토지'는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1945년 해방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최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조망하고 있지만, 모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恨)과 강인한 생명력을 소설화함으로써 어떠한 삶과 죽음이든 모든 생명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토지'의 지향은 600여 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영웅이나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미천한 이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예컨대, 거친 삶을 살았지만 인간의 도리를 잊지 않았던 평사리의 목수 윤보는 "날씨도 갠 날 흐린 날 눈비 오고 바람 불고 노성벽력 치고 하듯이 사람 살아가는 평생도 그 같은 거 아니겄나"며 사시사철 갠 날만 있다면 그것이 어찌 극락이겠냐고 말한다. 우리에게 다가올 날들이 어떠하든지 그 모든 것이 함께 흘러갈 것이니 너무 두려워하거나 자만하지 말라는 윤보의 말이 한가위 달빛 아래 고요히 울리고 있었다.
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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