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기록의 나라 조선(상)…조선의 사관, 만인지상 국왕이 두려워한 신하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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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16   |  발행일 2022-09-16 제35면   |  수정 2022-09-1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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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은 임란 후 1603년 선조 때 재간행한 태조실록 원문의 첫 장으로 태백산 사고본이다. 깔끔하고 반듯한 활자체는 기품 있고 흠 하나 없으며 조선왕조 기록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나머지 두 자료는 이담명의 사초. 조선사관의 유려한 행·초체로 필력이 대단하다. 오른쪽 첫 줄은 왕이 당일 시작한 행적을 의미하며 첫 글자 '上'은 왕을 뜻한다. 원 표시는 수결처럼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14세기 전근대기에 나라를 세워 왕조가 멸망하는 20세기까지 500년 동안 나라의 정사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인류 역사에서 500년을 왕업으로 유지한 왕조는 무척 드물거니와 왕조 일대기를 온전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한 왕조는 거의 없다. 기록은 왕조를 이끄는 동력이 됐고 실록은 역사의 보물로 인류 문화유산이 됐다. 국왕은 사초와 실록을 볼 수 없었다. 사관은 차라리 귀양 갈지언정 사필(史筆)을 꺾지 않았다. 만인지상인 국왕이 오로지 두려워한 것은 하늘과 사관이라 했다. 국초 이래 나라 기록은 국정의 중심이었고 실록은 나라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조선 왕조는 나라의 기록과 보존에 온 힘을 쏟았는가?

◆기록은 태조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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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인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어진박물관에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이 개국한 지 3년이 지난 1395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과 정충이 고려사 37권을 편찬하여 바치자 이를 흡족해하며 교서를 내렸다. '임금이란 하늘의 덕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반드시 역사를 써 책을 만드는 것은 일대의 전장(典章·제도와 문물)만을 갖추자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하기 때문이다. (중략) 전대(前代)의 흥망성쇠 자취는 반드시 뒷사람을 기다려 사서로 만들어지고 후왕들의 권계(勸戒)가 된다. 다스리게 되면 반드시 흥하고, 어지럽게 되면 망하는 것이 이치이니 어찌 전대의 역사를 보지 않으랴. 그러니 옛일을 거울삼아 앞에 가던 수레를 당연히 경계할 것이니라.'

태조 이성계는 무인이지만 지혜로운 군주였다. 혼돈의 14세기에 나라를 다시 세워 당대의 지성 집단에게 새 왕조 설계를 맡겼고 전대의 멸망사를 들여다보고 경계하여 500년 왕업의 기초를 다졌다. 이 고려사 37권이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김종서가 139권으로 개수하여 오늘날 전해 온다.

태조는 춘추관 건의를 받아들여 왕이 국정을 논할 때 사관이 좌우에 입시, 기록하도록 하였고, 겸임 사관은 각기 보고들은 것으로 사초를 만들고 지방 관아의 중요한 일을 철마다 보고받아 기록으로 남겼다. 정종 때부터 국왕의 공부인 경연에도 사관이 참석하여 학습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했으니 조선의 왕은 학업을 등한시할 수 없었다.

정종의 경연관 조박은 '국왕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과 사필이요, 하늘은 푸르고 높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이고, 사관은 국왕의 착하고 악한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만세(萬世)에 남기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렇듯 기록의 엄정함은 개국과 더불어 시작됐다.


조선 개국 3년째 태조 이성계 교서
"앞에 가던 수레를 경계할 것이니라"

왕의 말은 좌사, 행동은 우사가 기록
대신도 사관 없으면 국왕 친견 못해

직급은 7품 이하로 매우 낮았지만
사조에 흠 없는 문벌가 출신만 가능

실록제작 후 사초는 물에 씻어 없애
칠곡출신 이담명이 쓴 3년분은 남아
국역되면 예송논쟁 전모 밝혀질 듯



◆직급이 낮은 사관

사관의 직급은 매우 낮았다. 7품 이하 참하관으로 전임 사관과 겸임 사관으로 나누어진다. 전임 사관은 왕명을 관장하는 예문관의 여덟 관리로 7품 2명(봉교), 8품 2명(대교), 9품 4명(검열)이며 이를 '8한림'이라 불렀다. 겸임 사관은 다른 업무를 하면서 실록을 관장하는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고 있어 '겸춘추'라 했다. 대표적인 겸춘추는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 7품 주서와 가주서이다. 사관은 낮은 직급임에 불구하고 청화(淸華)한 자리로 보임에 있어 매우 까다로웠다. 반드시 문반 급제자이어야 하며 문벌 있는 가문 출신으로 사조(四祖)에 흠이 없어야 하고 초서로 빨리 써야 하므로 문필이 뛰어나야 한다. 사관을 거쳐야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사필은 춘추필법으로

사필은 춘추필법을 전범으로 삼았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저술한,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242년 역사서인데 어떻게 쓰였기에 그 필법이 5천년 동양 역사서 서술에 기준이 됐는가?

공자는 고국의 역사서인 춘추를 저술하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밝혀 그것으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다. 명분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했고 스스로 판단하여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 없었다. 공자는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요,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춘추필법은 명분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나 감정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술하는 직필(直筆)을 말하며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졌다. 춘추는 유가오경의 하나로 불후의 고전이 됐고 필법은 동양사서 저술의 전범이 됐다.

조선사관은 실록에 '사신은 논한다'로 대의를 밝혔다. 명종 때 경연을 언급하면서 '사대부가 자신의 배운 바를 왕에게 전달하는 곳이 바로 경연인데 경연관이나 국왕 모두 관심이 없으니 후세에 국왕의 덕이 이처럼 예스럽지 못한다 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라며 비판했고, 단양군수 황준량의 상소문을 보고 '어진 신하라면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게 될 것'이라고 대의를 밝혔다.

춘추란 세월의 흐름인 춘하추동의 준말로 한 해를 뜻하지만 왕조 일대기 또는 왕조의 역사로 그 의미가 넓혀졌고 오늘날에 춘추관으로 남아있다.

◆이담명의 사초

조선시대 국왕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하는 사관은 예문관 한림과 승정원 주서다. 그들이 쓴 사초는 초고이므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만든 후 물에 씻어 종이로 활용하니 남아있는 사초는 없다. 그런데 현종·숙종조에 승정원 가주서를 지낸 칠곡의 이담명이 쓴 사초가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왕조의 사초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담명의 사초는 현종13년(1672) 6월18일부터 숙종1년(1675) 5월8일까지 약 3년간 기록으로 수량이 총 161책이다.

이담명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귀암 이원정과 함께 숙종조 환국정치 때 영남 남인을 대표한 인물로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고, 사필은 등과 2년 후인 27세에 잡았다. 이담명의 사초는 분량의 방대하다. 승정원 가주서 3년간 사초가 현종실록(23책)과 현종개수실록(29책)을 합친 것의 3배나 되고 왕조실록 전체 분량의 5분의 1에 달한다. 초서로 쓴 방대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들어간 내용은 극히 일부분이니 당시 대단한 조선의 기록문화를 엿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가 만들어진 후 세초(洗草)하여 없애야 했지만 어떤 연유인지 이담명은 자신이 쓴 승정원 사초 3년분을 그대로 남겨놓았고 300년간 칠곡 귀암종가에서 세전 돼 오다가 2007년에 사초와 유묵 100여 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훗날 이 사초가 국역이 되면 갑인환국 당시 예송 논쟁의 전모가 보다 자세하게 밝혀질 것이다.

◆영남선비의 당후일기

당후일기는 승정원 주서가 작성한 일기식 사초인데 주서의 거처가 승정원 뒤에 있어 '당후'(堂后)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재 전해오는 당후일기 사초는 13점인데 그중 10점을 영남 선비가 썼다. 가장 오래된 것은 영남 사림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이 쓴 필재당후일기다. 우찬성을 지낸 충재 권벌의 중종 때 당후일기와 명종 때 퇴계가 쓴 당후일기를 학봉 김성일이 연보로 만든 퇴계사전초(史傳草)도 사초다.

이 밖에 당후일기가 남아있는 영남 인물은 안동 내앞의 운천 김용, 예천 남악종가 김빈, 닭실의 청사 권두기, 일직의 대산 이상정, 하회의 학서 류이좌, 칠곡의 독립운동가 강원형이며, 달성의 도신수가 충청도 도사 시절에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면서 쓴 겸춘추일기도 사초다.

◆실록 속의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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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국초부터 왕이 한 말은 좌사(左史), 왕이 한 행동은 우사(右史)가 기록한다고 했다. 이는 왕의 언행은 모두 후세에 전한다는 의미이다. 태종 때부터는 사관이 입시하지 않으면 대신이라도 국왕을 친견할 수 없었다.

사초로 인해 일어난 사화가 무오사화인데 중종 2년에 8한림이 연명으로 무오사화에 대한 사관의 견해를 밝혔다. '김일손 사초의 허실을 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사가(史家)의 필법이 모두 없어져 만세의 공론이 사라지고 전하지 못할까 심히 두려우며 어떻게 춘추필법이 펼쳐지겠느냐'면서 사초 내용을 연산군에게 고자질한 대신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모재 김안국이 여(女)사관을 두자고 주청하니 대간이 동조했다. '왕은 깊은 궁궐에 거처하므로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알 수 없으니 여사관을 두어 궁궐 내 왕의 언행을 사책에 기록해 놓아 뒷사람이 보고 선악을 알 수 있다'고 하니 중종은 '글에 능한 여자가 적고 사필은 아무나 잡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임진병화로 25년간 사초와 시정기를 잃어버린 선조 조정은 역사의 죄인이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춘추관 영사 류성룡을 중심으로 옛 사관의 기억을 되살리고 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미흡하나마 그런대로 복구했다.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사필은 꺾어지고 사관은 유명무실하게 된다. 정조실록에 180회 언급되던 사관이 헌종실록에 8회, 철종실록에 11회만 나오고 실록도 부실해지면서 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렇듯 사관은 당대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권계하였으므로 국왕이 덕치(德治)를 펼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왕조가 500년 왕업을 이루는 동력이 됐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권계하고 염두에 둔 후대는 바로 오늘날 우리였다. 우리를 위하여 조상은 당대의 사필을 꺾지 않았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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