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클래식 오딧세이] 러시아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 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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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23   |  발행일 2022-09-23 제37면   |  수정 2022-09-23 08:31
유럽 국가 중 문화적 열세…러시아적 서사·언어로 풍성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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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극장 무대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그 서곡이 수없이 연주되어 유명해진 오페라. 하지만 정작 그 오페라의 공연은 쉽사리 올려지지 못하는 미하일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푸시킨의 동명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푸시킨의 원작은 1820년에 완성되었고, 오페라는 약 20년 후인 1842년에 완성되어 그해 12월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볼쇼이 카멘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이야기는 키예프 공국(러시아의 기원인 루스는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키예프 공국은 11세기 중반 대공 집안의 분열로 쇠퇴할 때까지 동슬라브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력한 공국이었다)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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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키예프의 대공 스베토자르의 아름다운 딸 류드밀라가 용감한 용사 루슬란과 결혼식을 올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악한 마법사 체르나모르가 류드밀라를 납치한 것이다. 대공은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결혼을 결정했지만, 납치 사건 후 그 결정을 번복했다. 루슬란과 또 다른 구혼자였던 라트미르, 파를라프 세 사람에게 '누구든지 류드밀라를 구해온다면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세 사람은 류드밀라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떠난다.

외피는 모험, 마녀와 용사의 싸움과 같은 동화적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인간의 욕망, 이기심, 배신, 관용, 사랑과 같은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푸시킨의 '메타시(metapoetry)'라고 할 수 있다. 루슬란과 다른 구혼자들이 류드밀라를 구하러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늙은 현자, 마녀, 요정들과 같은 다양한 판타지적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작곡가는 오페라에서도 이런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페르시아 멜로디, 터키의 민속 리듬 등 이국적인 음악 요소와 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극적이고 화려한 작품으로 완성했다.

작곡가 글린카는 1837년부터 1842년까지 약 5년간 이 오페라에 매달렸다. 그는 '러시아적' 오페라를 쓰고 싶어 했다. 러시아어로 불리는 노래, 러시아적 서사를 담은 작품을 원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뒤떨어진 상태였다. 대부분의 연주회에서는 서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되었고,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 역시 그 스타일을 모방하는 정도에 그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음악이 러시아를 점령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러시아의 지리적인 이유와 기후 문제로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문화적 교류가 쉽지 않았던 탓이 크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친서구적 정책으로 모든 러시아적인 문화가 사라지다시피 했던 것도 이유이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들은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선호했고 러시아어는 하층민들의 언어로 여겼다. '구슬리'나 '발랄라이카'와 같은 민속 악기 역시 농민들이 연주했고, 러시아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동양적인 요소를 지닌 민속 음악 역시 주류 음악으로 흡수되지 못했다.

이렇게 열악한 문화적 현실에서 문학을 통해 러시아 언어의 체계를 정립하며 그 매력의 풍성함을 보여준 문학가 푸시킨과 러시아어로 불리는 노래, 러시아적 서사를 담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 글린카를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푸시킨은 '러시아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반면, 글린카는 러시아의 민족음악의 뿌리 정도로, 즉 민족음악이라는 좁은 카테고리에 국한하는 평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물론 글린카는 러시아 언어를 사용한 노래에 주목해 많은 가곡을 썼고, 러시아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고 그의 음악은 소위 '러시아 5인조'라고 불리는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민족주의 음악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로 이어지는 문화적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음악적 개혁 운동이 러시아에서 출발해 전 유럽으로 확산한 것 역시 음악사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음악(가)'라는 평가는 후대에 와서 학자들이 학문적 편의를 위해 여러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평가한 것이지, 실제로 글린카를 비롯한 그 음악가들이 민족주의적 이유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음악가들은 음악적, 예술적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을지 모를 일이다. 혹은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유산에서 실험 가능한 요소들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것이 더욱 '음악가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유가 어쨌든, 또 필자 한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작곡가 글린카는 '러시아 음악의 정신이자 뿌리'이고 '러시아 민족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글린카가 훌륭한 작곡가라는 사실이다. 이런 뛰어난 작곡가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5막 8장으로 구성되었고 전체 연주 시간이 3시간30분가량 되는 대작이다. 그래서 제작하기도 어렵고 설령 제작한다고 하더라도 3시간 이상이나 되는 긴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관객을 찾기는 어렵다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실제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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