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예술가들이 남기는 것들의 가치

  • 이하석 시인
  • |
  • 입력 2022-09-27   |  발행일 2022-09-27 제22면   |  수정 2022-09-27 09:28
한국 동요·동시문학의 개척자
일제강점기 아동문학가 윤복진
지자체의 아카이브 관심 바탕
작가 유족 희귀자료 기증 통해
한국 음악사·문학사의 재조명
끊어진 맥 잇는 계기가 형성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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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진

동시가 '땡길' 때가 있다. 현실이 팍팍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할 때 그런 것 같다. 필자 역시 수술 후 병상에 누웠을 때 시보다는 평소 거의 써보지 못했던 동시를 끄적거린 적이 있다. 따뜻한 말로 위로받고 싶어서였을까? 내 속에 갇혀 있던 어린 꿈의 싹들이 돌연히 몸의 통증 사이로 비집고 나온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자주 떠올리는 동시 한 편을 소개한다.

'봉사 나무/ 씨 하나/ 꽃밭에 묻고,// 하루해도 다 못 가/ 파내 보지요,// 아침결에/ 묻은 걸/ 파내 보지요.'

윤복진의 '씨 하나 묻고'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시가 일찍이 있었던가 묻고 싶은 작품이다. 까맣고 자그마한 꽃씨 안에 어떤 세계가 들어 있길래 그리도 예쁜 꽃이 피는 걸까 하고 궁금했을 터였다. 그래서 봉숭아 씨를 꽃밭에 묻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기에, 심은 지 하루해도 채 떨어지지 않았는데, 묻은 곳을 파본다. 싹이 텄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시간 개념이 없었기보다는 빨리 봉숭아꽃을 피워서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픈 마음이 앞질러 갔기 때문이리라. 그래, 윤복진은 누구보다도 일찍이 이 '어린 마음'의 순정함과 귀함을 잘 알고 챙겼던 우리 동요 동시 문학의 개척자였다.

그러나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다. 우리 문학사에 그가 떠올려지기 시작한 게 최근이다. 1950년 월북했기 때문이다. 1988년 해금이 된 이후에야 그의 이름이 불려져 1997년 창비사에서 그의 동요집 '꽃초롱 별초롱'이 엮어져 나왔다. 1949년에 나온 걸 재출간한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뿐이지 기실, 그의 이름은 일찍부터 동요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동향인 대구의 작곡가 박태준이 그의 동요들만 모은 동요집 '물새발자국'을 1939년에 내어 크게 문단의 시선을 모았을 정도였다.

윤복진은 190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대학과 호오세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0년대 '어린이'지에 시 당선으로 등단한 그는 윤석중, 이원수, 신고송, 서덕출, 최순애 등 같은 잡지 출신 시인들과 '기쁨사'라는 동인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 발행된 한국 최초의 동요곡집인 '조선동요백곡집'에 그가 지은 '하모니카' '고향 하늘' 등 여러 편이 홍난파 작곡으로 실렸다. 박태준과 함께 동요민요작곡집 '중중 때때중'과 '양양 범버궁'을 펴냈다. 10세 이하 유년층을 상대로 하는 짤막한 동요시를 많이 썼다. 김수향, 혹은 김귀환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1945년 '조선일보'에 평론 '아동문학의 당면과제-민족문학 재건의 핵심' 등을 발표했다. 1946년 4월 창간된 아동문학잡지 '아동'의 동시와 동요 부문을 맡아 집필했다.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부 사무국장을 지내고 6·25 때 월북한 뒤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1년 7월16일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으로 시작하는 동요 '가을밤'의 원작이 윤복진의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로 시작하는 노래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새롭게 찾아 내어져 불리는 그의 노래들 앞에서 우리는 새삼 한 파란 많은 작가의 삶을 떠올린다.


◆자료

윤복진 관련 자료가 대거 발굴됐다는 소식이다. 유족이 대구시에 350여 점을 일괄 기증한 것이다. 육필 자료뿐만 아니라, 박태준, 홍난파, 현제명 등 당대에 함께 교유했던 음악인들의 악보와 희귀 책자 등이 망라되어 있다. 육필 노트, 필사 악보 등 윤복진의 음악 자취와 함께 습작 과정을 보여주는 친필 노트들도 다수 포함됐다. 박태준 작곡 윤복진 작사 이인성 표지화로 펴낸 '물새발자국'(1939), 윤복진이 1929년 펴낸 '동요곡보집' '초등동요유희집'(1931), '현제명작곡집'(1933) 등 1920~40년대 악보집들이 눈길을 끈다. 그중 '동요곡보집'은 1920년대 잘 알려진 작사·작곡가들의 곡 35곡이 수록됐는데, 그간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던 귀중 자료이다.

또한 1938년 대구공회당에서 열린 제1회 신인가수선발콩쿠르 결선 프로그램 등의 공연 팸플릿과 '어린이' '아동' '음악평론' 등의 잡지들, 최남선의 '백팔번뇌', 이규환이 광복 후 제작한 영화 '똘똘이의 모험' 시나리오도 보인다. 대구뿐만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초기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앞으로 이들 자료를 통한 우리 음악사와 문학사의 재조명이 이루어질 것이 기대된다.


◆아카이브에의 관심

이들 자료는 한 예술가의 삶 이후 자료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 앞에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윤복진의 유족들은 그의 딸들이다. 그들은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점에서 감시와 고초와 핍박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유품들을 꼭꼭 숨겨왔다. 시월 항쟁 당시 다수의 자료들이 들킬까 싶어서 아궁이에 쓸어넣어졌고, 전쟁 때도 그때 그때 중요한 증거 자료들이 유실됐다. 윤복진의 유족 말마따나 "다 없어지고 찌끄레기(찌꺼기의 사투리)만 남은 것"을 이번에 내놓은 것이다.

월북 또는 좌편향 활동을 한 작가들의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마당에 가장 절실한 것이 이들의 자료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윤복진의 관련 자료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은 얼마나 다행한가? 이는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각 지자체들의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문화예술 활동의 고양과 지원도 필요하지만, 작가들의 자취를 챙기는 이런 자료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과거 소홀히 했던 작고 예술인들의 자료들이 이런 관심으로 확보됨으로써, 초창기 또는 일제강점기의 문화예술 활동의 폭을 넓히고 끊어진 맥을 잇는 계기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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