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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번 옮긴 끝에 2018년 팔조령 옛길 초입에 영구적으로 살게 될 작업실을 갖게 된 권기철. 올해로 54회 개인전을 가진 그는 비로소 자신의 그림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포부에서 벗어나 동서양 미술의 교점을 찾아 대양으로 항해를 시작하게 됐다. 올해 그의 그림이 거대한 변혁의 변곡점에 서 있다. 그런 그가 유채색으로 흐트러진 작업실 바닥에서 액션을 취하고 있다. |
이를테면, 말이다. 원(圓)으로 가는 '암울함'이 아니라, 수직으로 가는 '흥분'도 아니다. 수평으로 가는 '도도함'까지 모두 아니다. 그럼 그 모든 것도 전혀 아니란 말인가?
길을 '답'이라 여기는 자를 나는 인정할 수, 아니 상종할 수가 없다. 광장이 아니라 뒷골목, 허물어진 폐가의 우물이 있는 그 담 모퉁이에 폐병 환자처럼 종일 쪼그려 앉아 있는 몰골의 태생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해주길 바란다.
내 그림의 8할은 우연(무작위), 나머지 2할은 철두철미 계산(작위)이다. 그 작위는 무작위의 경계와 맞물려 있다. 무작위의 작위, 작위 같은 무작위를 위해 50년 이상 줄곧 그림에만 빠져 살고 있다. 나를 보니 그림으로 무장된 귀신 같다.
내 어린 시절은 '선천성 가난뱅이'였다. 중1부터 고3까지 6년간 중앙일보 영주지국에서 생쥐처럼 먹고살았다. 부모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슬픈 존재였다. 나는 고아의 가슴을 갖고 미술학원으로 피신했다. 화가의 꿈을 담은 닻을 내렸다. 거기서 키워낸 미학을 칼처럼 품고 경북대 동양화과에 자객처럼 스며들었다. 대학 시절 내 최대 무기는 인물 드로잉. 360도 모든 방향에서 인물의 특징을 단숨에 찾아낼 수 있었다. 학생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했다.
그때 나의 단짝은 음악(팝송)이었다. 이후 나를 클래식의 세계로 이끌어준 첫 뮤즈가 나타난다. 소설가 장정일과 10년 정도 붙어 다녔다. 두 번째는 내 사부인 화가 김호득, 마지막은 동물적 감각을 일깨워준 진주알처럼 몰려들었던 천사들이었다. 그림 그리고, 음악 듣고 술에 취해 있었다. 가장 지옥 같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음악 소리는 새롭게 헤쳐 모여를 했다. 단숨에 내 그림의 원천이 되었다. 나의 모든 그림의 바닥에는 음악이 흥건하게 고여 있다. 그 소리의 미학에 디자인 감각을 뇌관처럼 장착했다. 비로소 나는 당당하게 화가 권기철로 태어날 수 있었다. 보란 듯이 수 없는 공모전에 도전했다. 10여 개를 석권했다. 그리하여 서태지와 아이들이 핵폭탄을 터트리던 1993년 나는 시내 봉성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소리)을 연다. 그 시절에는 현악기와 가장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인 드로잉의 연장에 있는 인물이 짐처럼 박혔다. 그리고 이내 인물은 내 그림에서 사라진다. 완전한 추상의 세계를 터득한 셈이다. 가장 유현하고 암막(暗漠)한 먹빛 그리고 가장 찬란한 유채색의 향연이 절묘하게 섞였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비율, 그 섬뜩한 구도는 어린 시절 체득된 서예의 결구장법에서 기원한다. 나의 먹은 결국 한 일(一) 자로 요약된다.
내 미학은 크게 3기로 나눠진다. 2006년까지는 암갈색 같은 중성색 시절, 이후 내 아틀리에가 가창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의 색깔(초록), 2017년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전시 때부터는 색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동안 21번 옮겨 다녔던 작업실. 2018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팔조령 옛길 초입에 안착하게 된다. 작업실은 화가에겐 하나의 전쟁터의 진지 같다. 거기서 나는 먹고 그리고 잔다.
그림과 그림 사이, 심신이 뭉툭해지고 칙칙해질 즈음, 나는 날 다시 예리하게 갈아야 한다. 여행은 하나의 숫돌이다. 여행은 내 영혼을 맑고 깊게 만드는 하나의 누룩이다. 일본은 수도 없이 찾았고 인도는 6번 그리고 터키, 그리스, 이집트,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다녔다. 새로운 감각의 선을 채굴했다.
지금까지 억수처럼 개인전을 가졌다. 초창기에는 2년마다 전시를 하자고 다짐한다. 올해 54회 개인전(서울 앤 팩토리)을 갖고 있다. 이번 주제는 '무제(無題)'다. 그동안 소리는 둥글다·어이쿠 봄 간다·어이쿠 시리즈를 걸어왔다. 포구에 갇혀 있던 나의 그림이 이제 대해(大海)로 나오려는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화가 권기철(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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