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불고기 이야기(2) 대구 갈비문화 연 '진갈비'…새로운 맛 몰고온 '연탄석쇠돼지불고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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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14 08:37  |  수정 2022-10-14 09:41  |  발행일 2022-10-14 제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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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궁면에 가면 오징어불고기를 맛볼 수 있다.

◆설야멱적

조수삼이 쓴 세시기(歲時記)에서는 '설야멱을 일명 곶적(串炙)이라 하며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굽는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각종 놀이와 명절 풍속 등의 다양한 내용을 담은, 최영년이 지은 풍토세시기 해동죽지에 '설야적(雪夜炙)'이 나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명물로서,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삼성판 한국어대사전에는 '설적(薛炙)'이 나온다. '송도 설씨(薛氏)가 시작한 데서 유래한 말로,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이라고 쓰여 있다. 설적을 만드는 방법이 세시기에 나오는 설야멱과 같은 것으로 미루어 설야멱(적)이란 말이 '설리적'을 거쳐 '설적'으로 변하면서 그럴듯한 유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설야멱은 '눈 내리는 밤에 찾는 고기'라는 뜻인데, 조선 순조 때 조재삼이 쓴 송남잡식(宋南雜識)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태조가 눈 오는 밤에 진(晉)을 찾아가니 숯불 위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1800년대 말 작가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 '큰 잔치나 제사에는 일곱 가지 적을 쓰는데, 고기산적 외에 생선적·족적·닭적·꿩적·양서리목·간서리목'이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서리목'은 설야멱을 뜻하는 것으로 소의 밥통고기인 양이나 간을 넓게 썰어 잔칼집을 넣고 꼬챙이에 꿰어 석쇠에 구운 음식이다.

그러면 우리말의 '-서리목'은 단순히 한자어 '雪夜覓⇒雪裏炙'에서 유래한 말일까? 옛글에서 '서리'는 '사이·가운데'를 뜻하고 '목'은 '몫·꿰미'를 뜻하던 순수한 우리말이었다. 현대어 '목돈'도 그 잔재다. 가운데가 구멍 뚫린 엽전을 꾸러미로 엮어 허리춤에 꿰어 차고 다니던 지난 시절에 얼마 안 되는 몇 푼의 돈이 '푼돈'이고, '목돈'은 엽전 꾸러미에 가득 꿴 한 몫의 돈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므로 '雪夜覓·雪裏炙·雪下炙·薛炙'은 한글을 천시하던 지난 시절에 양반들이 '고기를 사이사이 꿴 한 몫의 음식'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서리목'을 비슷하게 소리 나는 한자어로 옮겨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옛 음식책에는 대부분 '고기를 꼬치에 꿰어 굽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석쇠나 번철이 널리 보급되면서 고기를 굳이 꼬치에 꿰어 구울 필요가 없게 되어 지금은 산적류만 꼬치에 꿰어 굽는다.

불고기는 조리 방법에 따라 미리 양념에 재웠다가 굽는 '양념구이'와 생고기를 그대로 썰어 굽는 '소금구이'가 있고, 굽는 방법에 따라 숯불구이, 석쇠구이, 돌판구이, 철판구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천 용궁 매콤 달콤한 오징어 불고기
고춧가루 없는 복불고기 개발로 화제

1957년 불고기 전문 '계산땅집' 오픈
한방 가미한 돼지불고기 시대 열기도

칠성시장 화근내 뿜는 연탄석쇠불고기
10여곳 성업하다 단골·함남식당 명맥
북성로 돼지불고기 포차촌 명성 이어
옛 국제극장 골목과 불고기 문화 3인방



◆너비아니와 방자구이

시의전서에 정육을 얇게 저며 양념한 것을 '너비아니'라 하였다. 조선요리제법(1939년)에서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이 나온다. '고기를 얇게 저며서 그릇에 담고 간장과 파 이긴 것·깨소금·후추·설탕을 넣고 잘 섞어서 굽는다'고 했다. 지금의 '양념구이'인 것이다. '너비아니'란 말은 소고기를 너붓너붓하게 썰어서 굽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소금구이를 '방자구이'라고 했다. 방자(房子)는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하인 이름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지난 시절에 고을 원님의 수발을 들던 남자 하인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다. 손님 안내와 공물 전달의 역할도 맡았던 방자는 등심이나 가슴살 등 원님의 밥상에 오르는 소고기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부위를 이따금 몰래 떼어내어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소금만 뿌려서 재빨리 구워 먹는 특권(?)도 누렸다. '방자구이'란 말은 이래서 유래한 것이다. 방자구이에 대하여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가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연한 고기를 얇게 저며서 씻지 말고 그냥 석쇠에 놓고 구워 먹으면 고명(=양념)한 것보다 더 맛있고 영양가도 높다'고 했다.

소금구이를 할 때 등심을 재료로 쓰면 '생등심구이', 갈비를 재료로 쓰면 '생갈비구이'라고 한다. 소금구이로 쓸 고기는 양념에 재울 고기보다 육질이 더 부드러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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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근한방돼지불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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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에 있는 한국관은 고춧가루 없는 맵지 않은 복불고기를 개발해 화제가 됐다.

◆대구의 불고기 역사

불고기는 갈비문화와 혼재돼 진화를 했다. 대구는 갈비와 불고기의 고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구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불고기를 개발한 곳도 드물다.

한국의 불고기는 정말 다양한 스타일로 진화를 한다. 주재료도 소와 돼지에서 벗어나 닭과 염소, 그리고 복어, 오징어 등도 불고기로 태어난다. 크게 보면 육수와 채소를 가미한 '전골 스타일',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역전회관은 물기가 없는 '바싹 불고기 스타일', 의성군 중앙시장 내 쇠머리국밥으로 유명한 남선옥은 '양념석쇠 스타일', 전남 담양시 덕인관은 '떡갈비 스타일', 예천군에 가면 오징어·복어불고기가 유명하다.

1957년 대구시 중구 계산동 현재 대동면옥 바로 옆에 초강력 불고기 전문식당이 탄생한다. 바로 '계산땅집'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요리를 배우고 귀국한 대구 출신의 박복윤씨가 오픈한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많은 불고기를 팔았다. 이 특수 때문에 강산면옥, 황해집, 남포집 등 지역의 냉면집도 불고기를 취급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갈비구이와 불고기는 달달한 양념이 생명. 왜간장·설탕·미원의 합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설탕이 가장 강력한 맛을 낸다. 설탕은 53년 6월 등장한다. 대구의 양조간장 본산 격인 삼화간장. 53년 11월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난다. 대구의 갈비문화는 계산땅집보다 4년 늦은 대신동 '진갈비'에서 형성된다. 계산땅집과 진갈비를 벤치마킹하고 거기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가미한 것이 '동인동찜갈비'다.

아무튼 계산땅집 특수를 이어받아 종로땅집·북성로땅집이 생긴다. 연이어 대구은행 대신점 근처 삼성갈비, 향촌동 향미, 시청 근처 합승면옥 등이 가세한다. 60~70년대 대구는 불고기천국이었다.

맹렬한 기세의 소불고기는 80년대까지가 전성기였다. 불판에 구멍이 뚫린 벙거지 스타일의 불판은 이제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다. 1979년 오픈한 중구 교동시장 근처 원도매식당에 가야 추억의 불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솔직히 소불고기 전통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대신 신개념 불고기가 새로운 맛을 몰고 온다. 그게 바로 대구가 메카랄 수 있는 '연탄석쇠돼지불고기'다. 칠성시장, 북성로, 옛 국제극장 골목이 새로운 불고기 문화를 선도한다. 돼지불고기의 경우 70년대 중반 현재 노보텔 대구 뒤편에서 오픈한 '팔군식당'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 한때 계산땅집과 쌍벽을 이룬다. 삼겹살보다 저렴한 다리 살에 고추장·고춧가루를 버무려 불고기를 구워 팔았다. 대박이었다. 한때 '대구 돼지불고기의 대명사'로 군림한다. 이 흐름은 78년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난 '대원돼지숯불갈비집'으로 이어진다. 대구의 첫 돼지갈비구이집이다. 이후 그 흐름은 남부정류장 근처의 미정이 '한방양념돼지갈비' 시대를 연다. 그 주역은 김태근한방돼지불고기 시대를 연 전 대구조리사협회장이었던 김태근 씨였다. 하지만 팔군도 비슷한 시기에 태동한 이들 3인방 연탄석쇠돼지불고기한테 주도권을 뺏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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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북성로 불고기는 가락국수가 세트로 붙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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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시장, 북성로와 함께 대구 연탄석쇠불고기의 3인방이 된 옛 국제극장 옆 불고기골목 전경.

◆칠성시장·북성로 불고기

북성로 돼지불고기의 형님 격인 연탄석쇠불고기집이 칠성시장 내에 두 곳 있다. 바로 '단골식당'과 '함남식당'. 단골식당이 선배 격이다. 화구별로 아줌마가 붙어서 연신 석쇠를 화로에 내리친다. 기름이 연탄불에 떨어지자 순간 30~60㎝ 불꽃이 인다. 그 불기운이 석쇠 속 고기에 들러붙어 '화근내(탄 냄새)'를 낸다. 60년대 초 친구 간인 유말선·김분선 할매가 동시에 석쇠불고기를 선보였다. 그 집이 잘되자 순식간에 10여 군데로 불어났지만 나중에 두 곳만 남고 다 사라진다.

옛 전매청 네거리에서 옛 금호호텔 네거리로 가는 서성로에는 서쪽으로 빠지는 골목이 4개가 있다. 세 번째 골목이 바로 북성로 돼지불고기의 탄생지. 정모씨로 알려진 한 포장마차 주인이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근처에서 돼지불고기를 '가락국수'와 함께 팔았다. 이게 북성로 불고기 시대의 시작이다. 불고기는 칠성시장 석쇠불고기, 가락국수는 당시 대박을 터뜨렸던 분식점, 동성로 미성당의 가락국수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불과 1년을 못 넘기고 박정만씨에게 바통을 넘긴다. 박씨도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주차장 자리에서 '대구은행 앞 돼지불고기'란 상호로 장사를 했다. 박씨도 비명횡사를 한다. 아무튼 그 무렵 6곳이 더 생겨난다. 그곳의 터주 격이었던 원조북성로불고기 최진수 사장도 2007년 뇌출혈로 타계한다. 북성로 불고기 개국공신은 다들 우울한 말로를 맞았다. 절정기에는 준호집, 북성로일번지, 부산갈매기, 달맞이, 불타는청춘, 디웅박, 신라의달밤, 태능집, 장작불, 오뚜기, 좋은날, 북성로포장마차 등 모두 13곳이 포진했다. 최근 인근이 아파트촌으로 개발되면서 더 이상 추억의 포차촌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돼 성장세를 잃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북성로는 초벌구이를 해뒀다가 주문받으면 재벌구이해서 내보낸다. 북성로는 젊은 단골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기름이 별로 없는 뒷다리(후지)를 사용하게 됐다. 미리 초벌한 탓에 맛이 좀 퍽퍽하다. 칠성시장은 목살, 삼겹살, 갈비 등 돼지의 온갖 부위를 사용하고 석쇠에서 딱 한 번 만에 구워내기 때문에 더 졸깃하고 향미도 강하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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