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이태원 참사가 남긴 것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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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02  |  수정 2022-11-02 06:42  |  발행일 2022-11-02 제27면

[영남시론] 이태원 참사가 남긴 것
허석윤 동부지역본부장

정말 믿기 힘든 참사다. 서울 한복판에서 156명이 압사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도 주로 20~30대의 젊은이들이. 과거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대구지하철이 불타고,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처럼 전 국민이 또다시 트라우마를 겪게 됐다. 세월호 이후 다시는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그때 정부와 정치권이 국가개조론까지 내세우며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가. 그래서 대형 재난 예방과 대응 능력이 향상됐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는 그 모든 게 헛된 기대와 착각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번 참사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우선, 집단적 안전 불감증이 여전히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경찰과 행정 당국의 안이한 대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 당일 이태원에 10만명이 넘는 축제 인파가 몰릴 것을 알면서도 안전대책에 손 놓고 있었다는 게 쉽게 이해가 안 간다. 안전을 책임질 주최자가 없는 행사였기에 더욱 그렇다. 경찰은 턱없이 적은 인원을 배치했고, 그마저도 교통과 치안 업무만 맡았다. 이를 두고 외신들은 인산인해의 군중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이태원 상황은 최근 정치적 시위 현장에서 민간인보다 경찰이 많은 것처럼 보인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번 참사도 결여된 안전의식 외에 우리 사회의 여러 병폐를 드러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타락한 인성과 이기주의다. 사고 현장에서 일부 사람들이 보인 몰상식한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수많은 이들이 생사를 오가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몇몇 클럽은 팝송을 한껏 틀어 놓고 영업을 했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대피하는 사람이 못 들어오게 한 가게도 있었다. 또 한 클럽 전광판에는 '이태원 압사 ㄴㄴ(노노) 즐겁게 놀자'라는 문구가 뜨기도 했다. 이들 업주는 사람 목숨보다 돈벌이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더욱 기가 찬 것은 근처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술과 유흥을 즐기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구급차의 붉은 경광등을 조명 삼아 떼춤까치 추는 무리도 있었다. 이들을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한 네티즌의 말대로 이태원 핼러윈은 귀신들의 축제가 아니라 악마들의 놀이판이었던 셈이다. 물론 악마는 말초적 쾌락에 영혼을 팔아먹은, 인두겁을 쓴 짐승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세월호 사고 때처럼 희생자들을 조롱, 모욕하는 인간말종들도 있다. MZ세대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함께 사는 사회라는 공감대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게 아쉽다.

물론 이태원 참사에서 절망만을 본 건 아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가 몇 시간이나 심폐소생술을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들어 사고 현장을 가려준 사람들이 있었다. 또 어떤 시민들은 난간 위에서 골목길에 갇힌 사람들을 손으로 끌어올려 구해주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영웅담을 자랑하기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런 의인들이 언제 어디에나 있기에 우리 사회는 살 만하고 희망이 있다.

집단 참사는 늘 교훈을 남기지만 우리는 쉽게 잊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라져야 한다. 꽃다운 청춘들의 죽음을 더욱 허망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사후약방문식 대책으로는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 재난 사각지대를 점검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가안전체계가 절실하다. 불의의 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허석윤 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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