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1) 수백년 이어온 팔도 별식 '가리구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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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11 08:05  |  수정 2022-11-11 08:22  |  발행일 2022-11-11 제33면
조선시대 한문 '갈비' 한글은 '가리' 불려
쇠가리 푹 끓인 '가리탕' 궁중연회상 차림
다산이 즐긴 소갈비·춘향가 등장 갈비찜
고기 발라 다시 살 붙인 서민 음식 떡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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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乫非)란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그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 소선상(小膳床) 편이다. 조선 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가리 등으로 불린 것 같다.

◆갈비 이야기

갈비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문헌을 살펴보면 소갈비는 협(脅), 돼지갈비는 박(拍)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갈비는 1600년대 초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도 '돈박(豚拍)'이 나오는데, '박(拍)을 박(膊)으로 삼으니, 갈비(脅)를 이름이다'란 구절이 나온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자였던 홍만선은 '산림경제'란 책을 통해 양갈비구이(灸羊脇骨)를 소개했는데, '껍질 붙은 양갈비 한 대를 두 토막씩 내어 망사 가루 한 움큼을 팔팔 끓는 물에 담가 따뜻하게 두었다가 구이를 잠갔다가 급히 뒤적여 익지 말게 하고, 다시 잠갔다가 다시 굽기를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좋은 술에 슬쩍 담갔다가 한 번 뒤적이면 바로 먹을 만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럼 갈비(乫非)란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그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 소선상(小膳床) 편이다.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9월24일에 사헌부(司憲府) 상소 내용에도 갈비가 등장한다. 인조 때는 소갈비나 돼비갈비를 연희 때 빠지지 않고 썼던 것으로 승정원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정조 19년(1795) 6월18일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에 갈비찜(乫非蒸)이 올라갔다.

조선 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가리 등으로 불린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은 불을 피워 놓고 소갈비를 큰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었다. 다산은 자신의 저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소고기의 맛있는 부위로 소 밥통, 양지머리, 갈비 등을 꼽았다. 특히 소갈비인 우협(牛脇)을 갈비라 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 색임'이라 하였으며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 하였다. 쇠가리를 푹 고아서 끓인 가리탕이 1890년 궁중연회상 차림에 보이나 갈비는 고려 시대 전부터 먹어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가리(乫飛)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가리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삶되 양을 튀한(털을 뽑기 위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낸) 것과 부아·곱창·통무·다시마를 함께 넣고 무르게 삶아 건진다'라고 요리방법을 적시했다.

송만갑의 판소리 수제자 박봉술의 춘향가에도 '갈비찜'이 나온다.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도 '귀신 같은 아이놈이 상 하나를 들어다가 놓으니, 어사(御使)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모조라진 상소반(床小盤)에 뜯어먹던 갈비 한 대'라는 대목이다.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자 요리연구가 방신영 교수가 쓴 '조선조리제법'에도 '가리구이'라는 조리법이 나와 있다.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가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갈비구의'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협적(脅炙)'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이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워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언론인·수필가·동화작가였던 조풍연에 의하면 '예전에는 갈비를 짝(소갈비 양쪽 중 한쪽)으로 팔아 가정에서 명절이나 잔치 때 한 짝을 사다가 잔치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으며 그 외에는 가리음식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광주시에 들어간 송정리에서 만난 갈비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정리에는 술집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가리구이를 시키면, 우선 풍로가 들어오고 자배기로 하나 가득 갈비 잰 것이 들어온다. 조그맣지만 한 대에 5전이었으니까 무척 쌌었다. 주객들 옆에서 작부가 가리를 연방 구워서 상에 올려놓는다. 다 먹은 뒤에 셈을 치를 때 남은 가리의 대수를 세어서 돈을 청구한다.'

그런데 이 갈비는 수원갈비나 이동갈비와 달리 떡갈비였을 것 같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도 송정리 일대에는 떡갈비집이 많았다. 지금은 해남과 담양에 있는 식당이 더 소문이 났지만, 당시만 해도 송정리가 으뜸이었다.

주지하듯이 갈빗살을 발라내 여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다시 갈비뼈에 붙인 후 석쇠에 구워내는 떡갈비. 비록 뜯어 먹는 재미는 덜 하지만 입에서 씹히는 갈빗살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떡갈비는 갈비에서 살코기를 다 뜯어내고 버려야 마땅한 것에서 고기를 발라내서 마치 살이 많이 붙은 갈비처럼 만들어 먹은 것이니,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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